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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횃불 2·28 민주운동

경제적 배경

국민 경제 수립의 실패

8·15해방으로 식민지 지배와 사회구조는 동요하고 해체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해방이 갖는 경제적 의미는 식민지 경제를 청산하고 민족 국가의 경제적 기초로서의 자주적 국민경제를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소유하게 함으로써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농민생활의 향상을 도모함으로써 민족 경제를 확립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해방 당시 한국 경제는 농업 부문에서 여전히 영세한 소농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공업 부문에서는 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까지 겹쳐 공업시설과 지하자원이 분할되었고, 남농북공(南農北工)적인 국내 분업체계의 발달 가능성마저 잃게 되었다. 특히 남한의 산업체계를 기형적으로 위축시켜 자생적 경제발전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미군정과 한국민주당의 결합에 의한 경제구조 변화는 미군정의 대(對) 한국정책에 의해 전개되었다. 미군정의 토지정책은 근대적 토지소유제의 확립이 아니라, 과격한 혁명의 방지 및 공산주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반공 국가를 조속히 건설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실제 시행된 농지개혁은 식민 통치 이래 당시까지 남아 있던 지배예속적인 토지 소유 관계를 청산하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자립적 국민경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당시의 시대적 요구와 일치할 수 없었다.
또한 미군정은 귀속재산의 관리에서 오는 부조리와 문제점을 극복하고 운영의 효율화를 꾀한다는 명분으로 귀속 산업체의 불하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반공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한국 자본주의 경제의 담당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목적이 내재된 조치였다. 이러한 일본인 사업체의 불하는 해방 이후 한국경제의 자본축적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경제와 자본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미군정의 경제정책이 가져다 준 결과는 자립적 국민경제의 건설이 아니라 식민지 경제구조가 가진 파행성의 연속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악성 인플레이션, 실질 임금의 하락, 실업률의 증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경제구조의 파행성을 보완해 준 것이 미국의 경제 원조였고, 결국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가 없이는 지탱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론적으로 미군정 시기에 이루어진 한국 자본주의 재편성의 결과는 비자본주의적 농촌 경제의 잔존, 매판적 관료 독점자본의 형성, 대(對) 미국 의존적 경제체제의 성립으로 귀결되었다.

경제적 불황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이루어진 일본인 귀속재산 처리는 미군정 시기 등용된 친일파들로 하여금 이권을 탈취하게 하여 경제 윤리를 타락시켰으며, 이후 한국의 경제구조를 특징지었다. 토지 분배의 결과 농민들은 과중한 부채에 시달려 대규모 이농 현상을 초래하였고, 이들은 다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여 사회적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민중의 염원을 무시한 경제정책은 농촌경제의 균형적인 발전 가능성을 잃게 하였고, 그것은 곧바로 사회적 불만과 불안으로 이어져 2·28민주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주된 경제적 상황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원조경제는 결정적으로 해방 이후로부터 2·28민주운동에 이르기까지의 경제구조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경제구조를 대외 의존적인 성향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원조는 한국의 자립 경제체제의 확립을 저해하여 파행적인 경제구조를 형성시켰고, 한국의 정치적 자주성을 박탈하였다.

이승만 정권 시기는 소수의 사람들이 한국경제를 독점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유착하여 일본인들에게서 접수한 적산(敵産)을 싼값으로 매입하거나 무상으로 불하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적산의 독점적 불하와 매입은 초기부터 한국의 경제활동에 있어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후반기에 오면서 중소기업들은 파산하고 소수의 대기업들만이 번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분배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였다. 1950년대의 미국 원조는 한국 재정수입의 거의 절반을 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 세계적 불황,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갈등으로 원조가 급속히 감소하자 1957년부터 원조경제는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 변화가 이루어져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제분·제당·면방직의 삼백(三白) 산업은 잠시 호경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국내공업과 유기적 관련을 갖지 못한 무상 원조 및 시설재를 기반으로 협소한 국내시장에만 의존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원조의 삭감, 국내시장의 협소함, 시설 과잉이라는 문제가 현실화됨에 따라 한국경제는 위기 국면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말 한국경제는 미국원조 감소에 따른 성장률의 둔화, 자유당 간부, 관료, 군, 재벌 등 특권층과 일반 서민들 간의 사회 불평등의 심화, 총노동 인구의 45%에 달할 정도의 실업률 증가 등이 나타났으며, 이는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여 사회적 적대감을 형성해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도시화와 교육의 확대와 매스컴의 성장으로 한국사회는 매우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급격한 도시화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도시로의 인구이동과 교육의 확대, 퇴역군인의 증대, 사회의 상업화, 농촌생활의 피폐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1955년 현재 전국의 국민 가운데 인구 2만 이상의 도시에 사는 사람은 전체의 43.2%였는데, 이는 1949년 현재의 27.5% 보다 크게 늘어난 것이다. 같은 기간 중 인구 5만명 이상의 도시에 사는 비율은 18.3%에서 34.5%로 늘어났고, 10만명 이상 도시에 사는 비율도 14.7%에서 28.8%로 크게 늘어났다. 교육의 확대로 중등학교 학생수는 1947년의 2만7천4백 명에서 1956년에는 73만 3185명으로 늘어났고, 전문학교 및 대학교 학생수도 같은 기간 중 1만 300명에서 9만 104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문맹률은 1945년 78%에서 1956년에는 10%로 급감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성장으로 일간신문의 발행부수가 특히 도시 지역에서 크게 늘어났는데, 1946년 총 38만 1300부였던 신문발행 부수가 1955년에는 198만부로 늘어났다. 이 같은 신문발행 부수의 격증은 도시화와 교육의 확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시화와 교육의 확대, 그리고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비판적인 민주의식의 고양을 가져왔고, 이것이 반이승만, 반자유당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비판적인 민주의식에 따른 이승만 정권의 부정, 부패에 대한 분노와 경제구조의 모순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결합하여 폭발한 것이 대구 2·28민주운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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