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배경
이승만 정부의 성립과 독재 정치
제1공화국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 또는 자유당 정권으로 불리는데, 이 기간에 자행된 독재를 강조하여 이승만 독재 정권이나 자유당 독재 정권으로도 불린다.
제1공화국의 전반에는 이승만 개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중반에는 이승만 개인과 자유당이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한 정치가, 후반에는 이승만 개인보다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승만은 개인적인 정치 세력을 갖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기존의 국내 정치 세력들을 물리치고 집권하였다. 그것은 이승만이 해방 정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명망과 개인적 인기 면에서 다른 정치인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또 이승만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경쟁자들이 암살되거나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뽑힐 수 있는 유일한 후보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국민주당 세력이 지원함으로써 국내 기반이 없었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해방 후 남한의 국가 성립 과정에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승리가 내포하는 역사적 의미는 친일 관료나 경찰이 해방된 한국에서 또 다시 정치, 경제, 행정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관료 출신들의 행정 기술을 바탕으로 건국 초기의 무질서한 행정 체계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방편으로 친일 관료들을 등용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생각대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지원 세력이 없었다. 한 때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을 지원하였던 한국민주당이 초대 내각 구성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 적대적인 세력으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이승만에게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제헌국회 2년 동안 국회 내에는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반(反)이승만 세력이 강화되어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었다. 또한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제헌국회에 불참하였던 중도파와 남북협상파가 모두 참가하여 국회에 대거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제2대 국회는 처음부터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권력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즉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부의 무능과 실책, 그리고 불법적인 행동들이 묵과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는 동안 부정부패,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국회 내 야당세가 강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이승만이 국회 내에서의 간접 선거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함을 의미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유당 창당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자유당은 창당 당시부터 통치자의 필요에 의해 하향식으로 조직된 정당으로서, 이승만의 전제 권력과 장기 집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력 추구를 위한 집합체로 조직된 자유당은 대중적 기반이 미약했는데, 이를 보완해 준 것이 행정권이나 경찰권 같은 관권(官權)이었다. 처음부터 지방 자치보다는 개헌을 위해 구성되었던 지방의회, 그리고 경찰력을 이용하여 일으킨 부산정치파동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발췌개헌을 통하여 재집권하게 된 이승만은 반공을 구실로 반민주적 전제(專制)를 시작하였으며, 의회는 전제적 행정권에 의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승만과 자유당은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군(軍)과 방첩대, 그리고 경찰의 지원을 받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며, 곧이어 이승만의 종신 연임을 보장하는 개헌안을 제출하고 “사사오입 개헌” 이라는 정치극을 연출하였다. 반면 “사사오입 개헌” 에 반대했던 세력들은 호헌동지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반공·반독재를 표방한 신당 건설을 주장하면서 반(反) 이승만 세력으로 결집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주당 창당이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70%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 장면(張勉, 1899~1966)이 당선되었다. 1952년 정·부통령 선거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던 자유당에게는 민주당 장면의 부통령 당선은 큰 충격이었다. 자유당의 권위주의 체제가 강화되는 만큼 국민들의 자유당에 대한 지지는 계속 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956년 8월에 실시된 시·읍·면장 선거와 시·읍·면의원 선거에서도 잘 나타났다.
1958년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다시 한 번 민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자 236명이 얻은 표수는 총투표수의 50%를 조금 넘었지만, 민주당 후보자 199명이 얻은 표수는 총투표수의 40%가 되어 자유당과 민주당 간의 표차가 제3대 선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또한 자유당 당선자의 90%는 농촌이나 지방에서 나왔고, 민주당 당선자의 60%는 도시에서 나왔다. 특히 수도인 서울에서는 민주당이 14명의 당선자를 내고 자유당은 겨우 1명의 당선자를 내어 전형적인 여촌야도(與村野都)의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자유당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투표로 나타난 것으로,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자유당 정권에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야당과 언론을 통제할 목적으로 국가원수의 명예훼손에 관한 처벌과 범법자의 언론·교육기관 취임 자격 박탈, 그리고 공무원의 반항·선동 처벌이라는 내용의 신 국가보안법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이미 진보당 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불온 문서 투입 사건, 뉴델리 사건 등으로 야당을 탄압해 온 자유당 정권이 보다 더 확실하게 야당의 세력을 억압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은 신 국가보안법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대통령 출마 봉쇄와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려는 것이며, 변호사 접견 금지와 2심제도 폐지는 헌법 위반이라고 반대하였다.
자유당은 언론에 대한 탄압까지 자행하여 1959년 4월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야당성향의『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 특별부에서 “경향신문 발행허가 취소 행정처분 집행정지”를 결정함으로써 속간되었다. 이에 정부는 다음날로 폐간 처분을 철회하고 무기한 발행 정지 처분을 내렸다. 자유당 정권의 이러한 조치는 헌법상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 것으로, 이미 자유당 정권에게 헌법적 보장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에 도입된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공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되어, 본래의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변질되어 자유민주주의는 형식화 되어버렸다. 즉 반공주의를 철저하게 정치 탄압과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짓밟고 하나의 가식으로 만들어 파행으로 몰고 갔다. 곧 자유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권위주의적 독재정치가 되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쓰라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의 생존논리가 되어 이승만 정권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게임이 전개되도록 하기 위해 이용하는 이념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경찰과 관료 등과 같은 비민주적인 억압수단을 이용하여 권위주의적 독재정치를 강행하였다.
이러한 독재정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적 외피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국회는 지속적인 탄압과 무력화 공작에 시달렸으나 계속 유지되었다.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과정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주기적인 선거를 준수함으로써 최소한의 정권의 정당성은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저항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으며, 자유민주주의를 한국 현실에서 구체화 시키고자 하였다.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풍부하게 흡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의 이상과 독재체제 강화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가장 뼈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의 심화로 줄달음쳐 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멸의 길로 들어갔다. 이전의 몇 차례 선거에서 부정과 관권 개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3·15 선거는 그 정도가 심했으며 부정과 불법으로 일관된 선거였다. 이러한 부정 선거에 국민들은 분노하였고, 그 분노가 최초로 폭발한 것이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의 2·28민주운동이었던 것이다.
제1공화국의 전반에는 이승만 개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중반에는 이승만 개인과 자유당이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한 정치가, 후반에는 이승만 개인보다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승만은 개인적인 정치 세력을 갖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기존의 국내 정치 세력들을 물리치고 집권하였다. 그것은 이승만이 해방 정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명망과 개인적 인기 면에서 다른 정치인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또 이승만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경쟁자들이 암살되거나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뽑힐 수 있는 유일한 후보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국민주당 세력이 지원함으로써 국내 기반이 없었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해방 후 남한의 국가 성립 과정에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승리가 내포하는 역사적 의미는 친일 관료나 경찰이 해방된 한국에서 또 다시 정치, 경제, 행정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관료 출신들의 행정 기술을 바탕으로 건국 초기의 무질서한 행정 체계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방편으로 친일 관료들을 등용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생각대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지원 세력이 없었다. 한 때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을 지원하였던 한국민주당이 초대 내각 구성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 적대적인 세력으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이승만에게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제헌국회 2년 동안 국회 내에는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반(反)이승만 세력이 강화되어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었다. 또한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제헌국회에 불참하였던 중도파와 남북협상파가 모두 참가하여 국회에 대거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제2대 국회는 처음부터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권력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즉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부의 무능과 실책, 그리고 불법적인 행동들이 묵과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는 동안 부정부패,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국회 내 야당세가 강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이승만이 국회 내에서의 간접 선거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함을 의미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유당 창당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자유당은 창당 당시부터 통치자의 필요에 의해 하향식으로 조직된 정당으로서, 이승만의 전제 권력과 장기 집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력 추구를 위한 집합체로 조직된 자유당은 대중적 기반이 미약했는데, 이를 보완해 준 것이 행정권이나 경찰권 같은 관권(官權)이었다. 처음부터 지방 자치보다는 개헌을 위해 구성되었던 지방의회, 그리고 경찰력을 이용하여 일으킨 부산정치파동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발췌개헌을 통하여 재집권하게 된 이승만은 반공을 구실로 반민주적 전제(專制)를 시작하였으며, 의회는 전제적 행정권에 의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승만과 자유당은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군(軍)과 방첩대, 그리고 경찰의 지원을 받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며, 곧이어 이승만의 종신 연임을 보장하는 개헌안을 제출하고 “사사오입 개헌” 이라는 정치극을 연출하였다. 반면 “사사오입 개헌” 에 반대했던 세력들은 호헌동지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반공·반독재를 표방한 신당 건설을 주장하면서 반(反) 이승만 세력으로 결집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주당 창당이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70%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 장면(張勉, 1899~1966)이 당선되었다. 1952년 정·부통령 선거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던 자유당에게는 민주당 장면의 부통령 당선은 큰 충격이었다. 자유당의 권위주의 체제가 강화되는 만큼 국민들의 자유당에 대한 지지는 계속 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956년 8월에 실시된 시·읍·면장 선거와 시·읍·면의원 선거에서도 잘 나타났다.
1958년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다시 한 번 민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자 236명이 얻은 표수는 총투표수의 50%를 조금 넘었지만, 민주당 후보자 199명이 얻은 표수는 총투표수의 40%가 되어 자유당과 민주당 간의 표차가 제3대 선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또한 자유당 당선자의 90%는 농촌이나 지방에서 나왔고, 민주당 당선자의 60%는 도시에서 나왔다. 특히 수도인 서울에서는 민주당이 14명의 당선자를 내고 자유당은 겨우 1명의 당선자를 내어 전형적인 여촌야도(與村野都)의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자유당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투표로 나타난 것으로,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자유당 정권에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야당과 언론을 통제할 목적으로 국가원수의 명예훼손에 관한 처벌과 범법자의 언론·교육기관 취임 자격 박탈, 그리고 공무원의 반항·선동 처벌이라는 내용의 신 국가보안법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이미 진보당 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불온 문서 투입 사건, 뉴델리 사건 등으로 야당을 탄압해 온 자유당 정권이 보다 더 확실하게 야당의 세력을 억압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은 신 국가보안법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대통령 출마 봉쇄와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려는 것이며, 변호사 접견 금지와 2심제도 폐지는 헌법 위반이라고 반대하였다.
자유당은 언론에 대한 탄압까지 자행하여 1959년 4월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야당성향의『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 특별부에서 “경향신문 발행허가 취소 행정처분 집행정지”를 결정함으로써 속간되었다. 이에 정부는 다음날로 폐간 처분을 철회하고 무기한 발행 정지 처분을 내렸다. 자유당 정권의 이러한 조치는 헌법상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 것으로, 이미 자유당 정권에게 헌법적 보장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에 도입된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공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되어, 본래의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변질되어 자유민주주의는 형식화 되어버렸다. 즉 반공주의를 철저하게 정치 탄압과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짓밟고 하나의 가식으로 만들어 파행으로 몰고 갔다. 곧 자유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권위주의적 독재정치가 되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쓰라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의 생존논리가 되어 이승만 정권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게임이 전개되도록 하기 위해 이용하는 이념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경찰과 관료 등과 같은 비민주적인 억압수단을 이용하여 권위주의적 독재정치를 강행하였다.
이러한 독재정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적 외피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국회는 지속적인 탄압과 무력화 공작에 시달렸으나 계속 유지되었다.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과정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주기적인 선거를 준수함으로써 최소한의 정권의 정당성은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저항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으며, 자유민주주의를 한국 현실에서 구체화 시키고자 하였다.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풍부하게 흡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의 이상과 독재체제 강화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가장 뼈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의 심화로 줄달음쳐 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멸의 길로 들어갔다. 이전의 몇 차례 선거에서 부정과 관권 개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3·15 선거는 그 정도가 심했으며 부정과 불법으로 일관된 선거였다. 이러한 부정 선거에 국민들은 분노하였고, 그 분노가 최초로 폭발한 것이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의 2·28민주운동이었던 것이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이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 1년 전부터 치밀하게 부정 선거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사실 1956년과 1958년의 선거에서 민심 이반을 확인한 자유당 정권은 인기와 지지도가 낮았던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서 전면적인 부정 선거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80세가 넘은 이승만이 임기 도중에 사망하거나 직무 수행 불능 등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았던 만큼, 대통령 유고시 계승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을 무조건 당선시켜야 할 형편 속에서 3·15 부정 선거가 준비되었던 것이다.
1959년 3월 자유당 정권은 경찰과 지방 행정의 총수인 내무부 장관에 친일파였던 최인규(崔仁圭, 1919~1961)를 임명하였다. 최인규는 온갖 부정 선거 운동을 예고하고, 그는 지방관서 순시 때 “공무원이 집무 시간 외에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은 선거법이나 공무원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또 “자유당을 리드하는 공무원은 파격적으로 승진시키겠다.”라고 약속하면서 자유당을 위해 모든 공무원을 동원하려고 하였다.
1959년 6월 29일 자유당이 전당대회에서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을 1960년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함에 따라 부정 선거 준비를 본격화한 내무부는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구체적인 부정 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하였다. 즉 4할 사전 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의 지침과 선거 당일 자유당 완장 착용자를 투표소 1백 미터 밖에 배치할 것, 투표함 수송 도중 투표함을 교체할 것, 개표 시 야당 표를 자유당 표로 바꿔칠 것,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5% 이상으로 할 것 등의 세부 계획을 마련하였다.
자유당 정권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준비하는 한편, 야당의 분열 책동과 일반 유권자의 포섭 공작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야당인 민주당은 당내 신·구파 간의 갈등과 자유당의 분열 책동 속에서 가까스로 1959년 11월 26일에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조병옥(趙炳玉, 1894~1960)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조병옥이 신병 악화로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정부는 2월 3일 “농번기를 피해서” 라는 이유를 내세워 3월 15일을 선거 날짜로 공고하였고, 이에 본격적인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다.
조병옥이 2월 15일 미국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급서함으로써 야당과 국민은 신익희에 이어 또 한 번 야당의 대통령 입후보자를 선거 운동 기간 막바지에 잃게 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조병옥의 급서로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이승만의 승리가 확정된 가운데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서도 이기붕의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미 준비해 온 부정 선거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치안국장은 1960년 2월경 치안국의 과장급등 66명으로 선거 독찰반을 편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선거 운동의 준비 과정을 독려하는 한편, 다시 이 독찰반을 감시하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2중·3중으로 물샐틈없이 부정 선거를 준비하였다.
3·15 정·부통령 선거 운동이 최고조에 달하던 1960년 2월 28일 장면의 유세가 대구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해 자유당은 이날 선거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즉 자유당 경북도당은 2월 10일 대구 시내 각 기관장과 각급 학교장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자유당 유세날인 2월 27일(토요일)에는 집집마다 1명 이상씩을 유세장에 동원하고, 각 기관·업소는 오후 1시 예정인 유세 강연 시작에 늦지 않도록 12시까지 업무를 끝내고 청중을 유세장에 최대한 동원할 것이며, 둘째, 민주당 유세날인 2월 28일(일요일)에는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행사를 가지게 하고,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행사를 계속하는 한편, 정치에 민감한 경향이 있는 고교생들은 일제히 등교시켜 유세장에 나갈 수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1959년 3월 자유당 정권은 경찰과 지방 행정의 총수인 내무부 장관에 친일파였던 최인규(崔仁圭, 1919~1961)를 임명하였다. 최인규는 온갖 부정 선거 운동을 예고하고, 그는 지방관서 순시 때 “공무원이 집무 시간 외에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은 선거법이나 공무원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또 “자유당을 리드하는 공무원은 파격적으로 승진시키겠다.”라고 약속하면서 자유당을 위해 모든 공무원을 동원하려고 하였다.
1959년 6월 29일 자유당이 전당대회에서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을 1960년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함에 따라 부정 선거 준비를 본격화한 내무부는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구체적인 부정 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하였다. 즉 4할 사전 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의 지침과 선거 당일 자유당 완장 착용자를 투표소 1백 미터 밖에 배치할 것, 투표함 수송 도중 투표함을 교체할 것, 개표 시 야당 표를 자유당 표로 바꿔칠 것,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5% 이상으로 할 것 등의 세부 계획을 마련하였다.
자유당 정권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준비하는 한편, 야당의 분열 책동과 일반 유권자의 포섭 공작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야당인 민주당은 당내 신·구파 간의 갈등과 자유당의 분열 책동 속에서 가까스로 1959년 11월 26일에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조병옥(趙炳玉, 1894~1960)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조병옥이 신병 악화로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정부는 2월 3일 “농번기를 피해서” 라는 이유를 내세워 3월 15일을 선거 날짜로 공고하였고, 이에 본격적인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다.
조병옥이 2월 15일 미국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급서함으로써 야당과 국민은 신익희에 이어 또 한 번 야당의 대통령 입후보자를 선거 운동 기간 막바지에 잃게 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조병옥의 급서로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이승만의 승리가 확정된 가운데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서도 이기붕의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미 준비해 온 부정 선거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치안국장은 1960년 2월경 치안국의 과장급등 66명으로 선거 독찰반을 편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선거 운동의 준비 과정을 독려하는 한편, 다시 이 독찰반을 감시하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2중·3중으로 물샐틈없이 부정 선거를 준비하였다.
3·15 정·부통령 선거 운동이 최고조에 달하던 1960년 2월 28일 장면의 유세가 대구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해 자유당은 이날 선거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즉 자유당 경북도당은 2월 10일 대구 시내 각 기관장과 각급 학교장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자유당 유세날인 2월 27일(토요일)에는 집집마다 1명 이상씩을 유세장에 동원하고, 각 기관·업소는 오후 1시 예정인 유세 강연 시작에 늦지 않도록 12시까지 업무를 끝내고 청중을 유세장에 최대한 동원할 것이며, 둘째, 민주당 유세날인 2월 28일(일요일)에는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행사를 가지게 하고,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행사를 계속하는 한편, 정치에 민감한 경향이 있는 고교생들은 일제히 등교시켜 유세장에 나갈 수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