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전개과정
일요일 등교 지시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 강압으로 얼룩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상황에 가장 먼저 저항하고 나선 것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이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교문을 뛰쳐나와 자유와 정의의 회복을 외치며 자유당 정권의 학정에 무기력하게 침묵하고 있던 민족혼을 일깨웠다.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저항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학교 측의 부당한“일요일 등교지시”였다.
대구지역은 단독정부 수립 후에 줄곧 야당세가 우세하였고,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자유당은 대구의 야당세를 누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특히 1960년 2월 27일 대구 수성천변의 자유당 유세(遊說)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청중을 동원하고, 다음날 같은 장소의 민주당 유세에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청중이 모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데 골몰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끝내 학원에 대한 통제로 이어져 결국 일요일 등교 지시령을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유당 경북도당은 유세 강연을 앞두고 2월 10일, 대구 시내 각 기관장과 단체장, 각급학교장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자유당 유세날인 2월 27일은 가구마다 1명 이상씩 유세장에 동원하고, 각 기관·업소는 오후 1시 예정인 유세 강연 시작 시간에 늦지 않도록 낮 12시까지 업무를 끝내고 유세장에 청중을 최대한 동원할 것. 둘째, 민주당 유세날인 2월 28일에는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 행사를 열고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행사를 계속하는 한편, 고교생들은 정치에 민감한 경향이 있으므로 일제히 등교시켜 유세장에 나갈 수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1960년 2월 15일에는 자유당 경북도 선거대책위원장 명의로 기관장 회의 소집통지서가 대구 시내 각 학교장 앞으로 발송되었다. 이 공문은 16일 오후 2시 상공회의소 3층에서 개최될 기관장 회의에 교장들의 참석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 날 회의 후 경북도 학무과장은 대구여중에서 다시 시내 고등학교 교장들만의 별도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자유당이 내세운 “토요일 여당 강연장 학생동원과 일요일 야당 강연장 학생 금족 조치”를 논의하였지만, “어느 쪽에는 학생을 동원하고, 어느 쪽에는 학생들의 발을 묶어 두고 …… 그럴 수 없다.”고 반대하는 일부 학교장들의 의견 때문에 지시 사항이 확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 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고, 다급해진 자유당 측은 26일 다시 기관장 회의를 소집하고, 각 학교장들에게 16일의 지시 사항을 재차 강조하였다.
대구지역은 단독정부 수립 후에 줄곧 야당세가 우세하였고,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자유당은 대구의 야당세를 누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특히 1960년 2월 27일 대구 수성천변의 자유당 유세(遊說)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청중을 동원하고, 다음날 같은 장소의 민주당 유세에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청중이 모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데 골몰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끝내 학원에 대한 통제로 이어져 결국 일요일 등교 지시령을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유당 경북도당은 유세 강연을 앞두고 2월 10일, 대구 시내 각 기관장과 단체장, 각급학교장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자유당 유세날인 2월 27일은 가구마다 1명 이상씩 유세장에 동원하고, 각 기관·업소는 오후 1시 예정인 유세 강연 시작 시간에 늦지 않도록 낮 12시까지 업무를 끝내고 유세장에 청중을 최대한 동원할 것. 둘째, 민주당 유세날인 2월 28일에는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 행사를 열고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행사를 계속하는 한편, 고교생들은 정치에 민감한 경향이 있으므로 일제히 등교시켜 유세장에 나갈 수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1960년 2월 15일에는 자유당 경북도 선거대책위원장 명의로 기관장 회의 소집통지서가 대구 시내 각 학교장 앞으로 발송되었다. 이 공문은 16일 오후 2시 상공회의소 3층에서 개최될 기관장 회의에 교장들의 참석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 날 회의 후 경북도 학무과장은 대구여중에서 다시 시내 고등학교 교장들만의 별도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자유당이 내세운 “토요일 여당 강연장 학생동원과 일요일 야당 강연장 학생 금족 조치”를 논의하였지만, “어느 쪽에는 학생을 동원하고, 어느 쪽에는 학생들의 발을 묶어 두고 …… 그럴 수 없다.”고 반대하는 일부 학교장들의 의견 때문에 지시 사항이 확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 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고, 다급해진 자유당 측은 26일 다시 기관장 회의를 소집하고, 각 학교장들에게 16일의 지시 사항을 재차 강조하였다.
운동의 계획
연합 궐기 모의
2·28민주운동이 일어난 시점은 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가 통보된 2월 25일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날 경북고등학교에서는 종례 시간에 “이번 일요일에는 빠짐없이 학교에 나와야 한다. 28일 오후 1시에는 여하한 사정이 있더라도 등교하라.”는 학교 당국의 통지가 있었다. “예정된 시간표가 중학생 입시 관계로 일부 변경되어 28일은 일요일이지만 시험을 실시하겠으니 모두 불만없이 따르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초 3월 3일 시작한다고 공표되었던 학기말 시험 일정을 갑자기 변경하고,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하라는 지시에 학생들은 이를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학생들은 담임교사를 상대로 신랄한 질문을 퍼부었다. 한 학생이 “그 날이 일요일이며 민주당 강연회가 있는데, 시험과 그 강연회가 아무 관계가 없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담임교사는 학교 사정에 의한 것임을 거듭 강조할 뿐이었다. 이에 학급자치회장은 즉시 학급회의를 열고 저녁 늦게까지 이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상급생 및 다른 반 학생들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다시 굳게 뭉쳐 투쟁하자는 뜻을 모으고 학생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26일 아침 등교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 강요 처사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1·2학년 모든 학급에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일요일에 등교할 이유가 뭐냐?”,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정치적 이용물이 되어야 하느냐?”, “아니다. 학교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라는 등 입씨름과 성토가 온 학교를 들끓게 하였다. 학생들의 여론이 아주 험악했기 때문에 학생위원회 대의원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학생위원회를 소집하기 위해 대의원들은 “2월 28일 하오 1시 등교에 관한 일”이란 소집 안건을 작성하여 지도교사를 찾아갔다. 지도교사는 말없이 안건을 학생과장에게 넘겼고, 학생과장은 씁쓰레 웃으며 다시 교감에게 넘겼다. “중학교 시험 관계로 일요일에 부득이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대의원 소집은 필요 없다.”고 설명하는 교감에게 대의원들은 “그러면 시간을 따져보자.”고 대응하였다. 한참 동안의 망설임 끝에 교감은 학생위원회 개최를 허락하였다.
학생위원회는 “첫째, 일단 3월 3일로 결정 발표된 시험 일자를 변경한다는 것은 관례상 부당하다. 둘째, 시험기간의 단축으로 준비에 지장이 있다. 셋째, 하필이면 휴양의 자유를 박탈하여 일요일에 실시코자 하는가. 넷째, 민주당의 강연회건 어디 강연회건 정치관계 때문에 피해입고 싶지 않다. 다섯째, 어떤 정당의 강연회를 듣건 학생 자신의 자유가 아니냐.”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학교 당국의 시험기일 단축과 일요일 등교지시에 불응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학교 측에 의해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대의원들은 “그러면 시험을 치르지 않는 대신 월요일 수업을 일요일에 하고, 월요일은 휴일로 해야 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이러한 학생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학교 측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의원들은 즉각 학급에 이를 통고하였고 학생들의 여론도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날 종례시간을 통해 담임교사들은 “일요일 시험방침은 변경 없다.”고 다시 확인하였다. 시험을 빌미로 휴일에도 자신들을 교내에 붙잡아두려는 처사에 전교생들은 울분을 터뜨렸다. 교사들은 그저 “어쩔 수 없으니 등교하도록 하라.”는 말로 흥분한 학생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종례가 끝난 후에도 학생들은 모두 교실에 남아 “더 이상 정치적 제물로 이용당할 수 없다.”, “불합리를 묵인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학교 당국의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등교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아침부터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문제를 두고 또 다시 설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날 오전 9시에는 긴급 학생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1학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학생 대표들의 발언이 소극적이었다. 상당수 학생의 부친이나 형, 친척이 공무원, 교사 등 공적인 위치에 있어 자칫 피해를 줄 수 있는데다가 사회 분위기 자체도 너무나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랜 토의 끝에 시험 실시 계획의 철회를 요구하는 건의안을 들고 학교장을 찾아갔다. 학교장은 학생들의 추궁에 괴로운 듯 “그러면 시험은 그만두고, 영화 감상으로 대체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러한 절충 결과를 대의원들이 각 반에 보고하였지만, 학생들은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학급에서는 얼마 전에 있었던 내무부장관의 대구 방문 당시를 거론하며, 그때는 학생을 강제로 동원하여 환영했으면서, 장면 부통령이 지역을 찾는다니까 단속 하려는 행정기관과 학교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또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정의라고 배웠는데, 불합리한 현실을 방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그러자 담임은 “교육자로서의 양심이 나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우리들 소수로는 어쩔 수 없으니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다. 부디 내일 하루만은 무사히 넘기도록 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날 27일은 자유당의 정치 강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공무원과 학생들을 동원하기 위해 도(道) 당국은 각 학교에 단축수업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경북고등학교도 이에 호응해 정오쯤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는 상당수 학생들의 가슴 속에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다짐이 싹트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경북고등학교 이대우(李大雨) 부위원장은 데모를 결행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몇몇 동료들에게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대부분 공감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평소에 글재주가 뛰어났지만, 3학년에서 공납금 미납으로 퇴학당한 하청일(河淸逸)을 찾아가 결의문 작성을 부탁하였다. 저녁 6시 30분쯤, 이대우 부위원장이 결의문 초안을 받아 들고 삼덕동 집으로 돌아와 보니 경북고의 전화섭·권준화·이영소·하청일·윤종명·안효영, 대구고의 윤풍홍·장주효·손진홍, 경북대사대부고의 최용호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고와 사대부고 학생들은 전날까지 학교에서 언급이 없다가 이날 종례시간에 갑자기 일요일 등교 지시를 받은 터라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뒤늦게 연락받은 학생들이 합류하여 비좁은 방엔 30여 명이 모였다. 마침내 밤 11시쯤 이들은 28일 오후 1시를 기해 데모를 결행하기로 합의하고, 다른 학교에도 이 사실을 알리려 하였으나 이미 시간이 늦어 알리지 못하였다. 데모에 사용할 구호로는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를 주된 구호로 하고,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을 부차적인 구호로 결정하였으며, 결의문은 각 학교가 독자적으로 작성해 발표하기로 하였다. 이날 밤 모의에서 경북고와 대구고는 데모 전에 상호 연락을 취하며 시간을 맞추기로 하고, 반월당에서 두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기로 합의하였다. 밤이 깊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남은 7명은 손을 마주잡고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첫째, 2월 28일 오후 1시를 기해 일제히 궐기하여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피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한다. 둘째, 데모에 참가한 학생을 구속하거나 교사들에 대한 인사 조치가있을 경우 데모를 계속할 것이며, 사태가 악화될 경우 백만 학도들에게 호소한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자세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 궐기하기로 하였지만 은근히 걱정되고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치열한 선거 기간에, 그것도 자유당의 위세가 등등한 가운데 반기를 들고 나선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역 신문인『영남일보』는 이날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2월 27일 밤, 당시 경북고등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군 집 냉돌방에는 각 학교 간부들이 문풍지를 새나가지 않을 낮은 소리로 무언가 머리를 마주 대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 2·28 데모의 진통의 소리가 밤이 깊어감에 더 높아 가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간 구수회의(鳩首會議) “2·28데모의 산실”에서는 어둡고 괴로운 일당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데모의 결의를 마침내 낳고, 어느 아침보다 더 선명히 밝은 아침 햇살을 받았다. 27일 밤 3개 고등학생 대표자의 구수 회합에서는 자유당의 정치 악에 정면으로 도전하자는 28일의 데모 계획이 만들어졌다. “하자!”는 측은 학도의 명분을 들었다.
“12년 이승만 일당 독재의 민주공화국은 정치 악에 부패되어 조국의 명맥이 질식사의 선상에서 후들후들 떨리고 있다. 약아빠진 기성들을 믿고 이 이상 더 현실을 좌시하고 우리들만의 안온한 상아의 전당에 묻혀 오불관언(吾不關焉)할 수는 없다. 보다 역사의 사명을 떠맡은 청년의 기개를 다할 수 있는 3·1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독재자에 항거해 봉기하자.”는 것이 주된 논지였다.
이에 비해 “못한다.”는 측은 “만약 항거 데모를 했다간 우리는 그날로 맞아죽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실효 없게 개죽음이야 당할 수 있느냐?”라는 신중론을 내세웠다. 양측의 이론이 모두 일리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름 없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연약한 보잘것없는 생명들이 조국 민주주의의 번영에 한줌 밑거름이나마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서 우리는 족하지 않느냐.”라는 결론에 마침내 도달하였다. 이들 3개 고교 대표 학생은 “천당에서 만나자”는 결연한 악수를 나누고 28일 거사에 나섰던 것이다.
학생들은 담임교사를 상대로 신랄한 질문을 퍼부었다. 한 학생이 “그 날이 일요일이며 민주당 강연회가 있는데, 시험과 그 강연회가 아무 관계가 없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담임교사는 학교 사정에 의한 것임을 거듭 강조할 뿐이었다. 이에 학급자치회장은 즉시 학급회의를 열고 저녁 늦게까지 이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상급생 및 다른 반 학생들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다시 굳게 뭉쳐 투쟁하자는 뜻을 모으고 학생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26일 아침 등교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 강요 처사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1·2학년 모든 학급에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일요일에 등교할 이유가 뭐냐?”,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정치적 이용물이 되어야 하느냐?”, “아니다. 학교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라는 등 입씨름과 성토가 온 학교를 들끓게 하였다. 학생들의 여론이 아주 험악했기 때문에 학생위원회 대의원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학생위원회를 소집하기 위해 대의원들은 “2월 28일 하오 1시 등교에 관한 일”이란 소집 안건을 작성하여 지도교사를 찾아갔다. 지도교사는 말없이 안건을 학생과장에게 넘겼고, 학생과장은 씁쓰레 웃으며 다시 교감에게 넘겼다. “중학교 시험 관계로 일요일에 부득이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대의원 소집은 필요 없다.”고 설명하는 교감에게 대의원들은 “그러면 시간을 따져보자.”고 대응하였다. 한참 동안의 망설임 끝에 교감은 학생위원회 개최를 허락하였다.
학생위원회는 “첫째, 일단 3월 3일로 결정 발표된 시험 일자를 변경한다는 것은 관례상 부당하다. 둘째, 시험기간의 단축으로 준비에 지장이 있다. 셋째, 하필이면 휴양의 자유를 박탈하여 일요일에 실시코자 하는가. 넷째, 민주당의 강연회건 어디 강연회건 정치관계 때문에 피해입고 싶지 않다. 다섯째, 어떤 정당의 강연회를 듣건 학생 자신의 자유가 아니냐.”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학교 당국의 시험기일 단축과 일요일 등교지시에 불응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학교 측에 의해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대의원들은 “그러면 시험을 치르지 않는 대신 월요일 수업을 일요일에 하고, 월요일은 휴일로 해야 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이러한 학생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학교 측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의원들은 즉각 학급에 이를 통고하였고 학생들의 여론도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날 종례시간을 통해 담임교사들은 “일요일 시험방침은 변경 없다.”고 다시 확인하였다. 시험을 빌미로 휴일에도 자신들을 교내에 붙잡아두려는 처사에 전교생들은 울분을 터뜨렸다. 교사들은 그저 “어쩔 수 없으니 등교하도록 하라.”는 말로 흥분한 학생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종례가 끝난 후에도 학생들은 모두 교실에 남아 “더 이상 정치적 제물로 이용당할 수 없다.”, “불합리를 묵인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학교 당국의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등교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아침부터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문제를 두고 또 다시 설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날 오전 9시에는 긴급 학생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1학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학생 대표들의 발언이 소극적이었다. 상당수 학생의 부친이나 형, 친척이 공무원, 교사 등 공적인 위치에 있어 자칫 피해를 줄 수 있는데다가 사회 분위기 자체도 너무나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랜 토의 끝에 시험 실시 계획의 철회를 요구하는 건의안을 들고 학교장을 찾아갔다. 학교장은 학생들의 추궁에 괴로운 듯 “그러면 시험은 그만두고, 영화 감상으로 대체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러한 절충 결과를 대의원들이 각 반에 보고하였지만, 학생들은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학급에서는 얼마 전에 있었던 내무부장관의 대구 방문 당시를 거론하며, 그때는 학생을 강제로 동원하여 환영했으면서, 장면 부통령이 지역을 찾는다니까 단속 하려는 행정기관과 학교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또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정의라고 배웠는데, 불합리한 현실을 방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그러자 담임은 “교육자로서의 양심이 나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우리들 소수로는 어쩔 수 없으니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다. 부디 내일 하루만은 무사히 넘기도록 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날 27일은 자유당의 정치 강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공무원과 학생들을 동원하기 위해 도(道) 당국은 각 학교에 단축수업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경북고등학교도 이에 호응해 정오쯤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는 상당수 학생들의 가슴 속에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다짐이 싹트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경북고등학교 이대우(李大雨) 부위원장은 데모를 결행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몇몇 동료들에게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대부분 공감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평소에 글재주가 뛰어났지만, 3학년에서 공납금 미납으로 퇴학당한 하청일(河淸逸)을 찾아가 결의문 작성을 부탁하였다. 저녁 6시 30분쯤, 이대우 부위원장이 결의문 초안을 받아 들고 삼덕동 집으로 돌아와 보니 경북고의 전화섭·권준화·이영소·하청일·윤종명·안효영, 대구고의 윤풍홍·장주효·손진홍, 경북대사대부고의 최용호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고와 사대부고 학생들은 전날까지 학교에서 언급이 없다가 이날 종례시간에 갑자기 일요일 등교 지시를 받은 터라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뒤늦게 연락받은 학생들이 합류하여 비좁은 방엔 30여 명이 모였다. 마침내 밤 11시쯤 이들은 28일 오후 1시를 기해 데모를 결행하기로 합의하고, 다른 학교에도 이 사실을 알리려 하였으나 이미 시간이 늦어 알리지 못하였다. 데모에 사용할 구호로는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를 주된 구호로 하고,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을 부차적인 구호로 결정하였으며, 결의문은 각 학교가 독자적으로 작성해 발표하기로 하였다. 이날 밤 모의에서 경북고와 대구고는 데모 전에 상호 연락을 취하며 시간을 맞추기로 하고, 반월당에서 두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기로 합의하였다. 밤이 깊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남은 7명은 손을 마주잡고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첫째, 2월 28일 오후 1시를 기해 일제히 궐기하여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피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한다. 둘째, 데모에 참가한 학생을 구속하거나 교사들에 대한 인사 조치가있을 경우 데모를 계속할 것이며, 사태가 악화될 경우 백만 학도들에게 호소한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자세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 궐기하기로 하였지만 은근히 걱정되고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치열한 선거 기간에, 그것도 자유당의 위세가 등등한 가운데 반기를 들고 나선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역 신문인『영남일보』는 이날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2월 27일 밤, 당시 경북고등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군 집 냉돌방에는 각 학교 간부들이 문풍지를 새나가지 않을 낮은 소리로 무언가 머리를 마주 대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 2·28 데모의 진통의 소리가 밤이 깊어감에 더 높아 가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간 구수회의(鳩首會議) “2·28데모의 산실”에서는 어둡고 괴로운 일당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데모의 결의를 마침내 낳고, 어느 아침보다 더 선명히 밝은 아침 햇살을 받았다. 27일 밤 3개 고등학생 대표자의 구수 회합에서는 자유당의 정치 악에 정면으로 도전하자는 28일의 데모 계획이 만들어졌다. “하자!”는 측은 학도의 명분을 들었다.
“12년 이승만 일당 독재의 민주공화국은 정치 악에 부패되어 조국의 명맥이 질식사의 선상에서 후들후들 떨리고 있다. 약아빠진 기성들을 믿고 이 이상 더 현실을 좌시하고 우리들만의 안온한 상아의 전당에 묻혀 오불관언(吾不關焉)할 수는 없다. 보다 역사의 사명을 떠맡은 청년의 기개를 다할 수 있는 3·1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독재자에 항거해 봉기하자.”는 것이 주된 논지였다.
이에 비해 “못한다.”는 측은 “만약 항거 데모를 했다간 우리는 그날로 맞아죽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실효 없게 개죽음이야 당할 수 있느냐?”라는 신중론을 내세웠다. 양측의 이론이 모두 일리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름 없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연약한 보잘것없는 생명들이 조국 민주주의의 번영에 한줌 밑거름이나마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서 우리는 족하지 않느냐.”라는 결론에 마침내 도달하였다. 이들 3개 고교 대표 학생은 “천당에서 만나자”는 결연한 악수를 나누고 28일 거사에 나섰던 것이다.
학교별 전개 과정
2·28민주운동은 대구 시내에 소재한 8개 고등학교의 1·2학년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모두 국·공립 고등학교의 학생들이었는데, 학교별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경북고등학교
- 대구고등학교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교
- 대구여자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대구농림고등학교
- 대구상업고등학교
(현 대구상원고등학교)
경북고등학교
2월 25일 경북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 입시 관계로 시험일정이 변경되어 28일이 일요일이지만 학기말 시험을 실시하겠다(뒤에 영화감상으로 대체됨)는 학교 측의 통지가 있었다. 학생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그 날이 일요일이며 민주당 강연회가 있는데, 시험과 그 강연회가 아무 관계가 없는가?”라며 추궁하였고, 교사는 학교 사정에 의한 것임을 거듭 강조할 뿐이었다.
2월 28일 경북고 학생들은 12시쯤부터 학교(현재 청운맨션 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12시 30분이 되자 등교한 학생들은 모두 교실 밖에서 무리를 지어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대우 학생부위원장은 일단 운영위원회를 소집해서 결의문을 정식으로 채택한 다음 데모를 시작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를 발견한 여러 학생들은 앞 다퉈 당일의 계획을 따지듯이 물어댔고, 교정은 점차 흥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12시 50분쯤 대부분의 학생들이 등교했고, 8백여 명에 이르는 전교생이 조회단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움직임을 알아차린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나와 “곧 극장으로 출발할 테니 1·2학년은 간격 30m로 떨어져 서라.”고 소리치며 학생들을 분산시키려고 애썼지만, 기세가 오른 학생들은 오히려 간격을 좁히면서 “와-”하는 함성과 함께 굳게 뭉쳤다. 일부 학생은 흥분에 못 이겨 단상 앞으로 뛰어나가 빨리 데모를 벌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때 대구고 학생부위원장이 방문하여 대구고 학생들이 이미 교문을 나섰다는 소식을 전했고, 이 소식을 접한 경북고 학생들은 운영위원회를 미처 소집하기도 전에 폭발 단계에 이르렀다.
12시 55분이 되자 부위원장 이대우와 학생위원 안효영이 갑자기 두루마리 결의문을 움켜쥐고 단상에 뛰어 올랐다. 교사들이 제지하려고 했지만, 전교생이 조회단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결의문을 읽어 내려가는 부위원장의 음성은 떨렸고, 흥분이 고조된 8백여 명의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오후 1시 5분, 전교생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선생님들이 만류했으나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데모대는 삼덕우체국 앞에서 수성천변의 유세장으로 가는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 일행과 마주쳤다. 장면 박사를 보는 순간 학생들은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고 장면 후보는 손을 흔들어 응답하였다.
학생들은 달리며 “일요일 등교의 저의가 무엇이냐?”,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쉼 없이 외쳤다. 이들은 대구상고(현재 센트로팰리스 자리), 경북대사대부고 앞에 이르러 동참을 호소한 뒤, 반월당 네거리로 진출하였다. 반월당에서 2분간 정체하자 한 학생이 “도청으로 가자.”, “도(道) 학무(學務) 담당자들에게 우리들의 뜻을 알리자.”고 외치자 데모대는 중앙로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중앙파출소 앞을 지날 때까지도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너무 의외의 사태라 경찰도 미처 손을 쓰지 못하였다. 어느 교통순경은 데모에 방해가 될 차량의 운행을 정지시켜 줄 만큼 데모의 성격을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대구매일신문사(현재 국민은행 대구지점 자리) 앞에 이르렀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원 내에 정치세력 배제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은 그들의 주장을 언론기관에 호소하였다. 1백여 미터에 이르는 데모행렬은 한국은행 대구지점(현재 서울 신탁은행 자리) 모퉁이를 돌아 경상북도 도청(현재 경상감영공원 자리) 마당으로 진입하였다. 이때가 오후 1시 30분경이었다. 경상북도 도청에 몰려든 학생들은 “우리는 정당하다.”, “정의는 살아 있다.”, “일요일 등교의 폐습을 시정하라.”등의 함성을 질렀다. 안효영 학생이 경상북도 도청 중앙정원에 뛰어 올라가 “불합리를 방관할 수 없 다.
땅을 치고 통곡해도 이 소리가 들리지 않나?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관철키 위해 한사코 노력하자.”고 열변을 토했고, 이어서 이대우가 뛰어 올라 결의문을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찰들의 제지로 끝을 맺지 못하였다.
이 무렵 경상북도 도청 구내에 있던 경북경찰국(현재 호수빌딩 자리)에서 최초로 5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데모대가 경상북도 도청 문 동쪽 방향으로 쏠리다가 대부분 도청을 빠져 나올 순간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과 부딪쳐 피를 흘리게 되었다. 몇몇 경찰관은 경찰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구둣발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런 모습을 본 일부 학생들은 자신이 체포된다는 걱정은 떨치고 경찰에 대항하여 동료를 구해내기도 하였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지나가는 버스를 정차시켜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붙들어 버스에 태우기 시작하였다. 경상북도 도청에서 채 나오지 못한 50여 명과 이때 붙들린 65명은 경북경찰국으로 실려 갔다.
도청 제1경비진을 뚫고 나와 다시 한국은행 대구지점(현재 하나은행 대구기업금융센터 자리)으로 달려 온 250여 명의 학생들이 다시 대오를 짜고 “학생데모의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대구시청 쪽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연도(沿道)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이 정의의 대열을 향해 무언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데모대는 다시 자유당 경북도당사(현재 경상감영공원 자리) 앞에 이르렀다. 당국은 수백 명의 경찰 병력을 투입했고 무자비한 곤봉 세례와 억센 주먹이 난무하는 유혈극 속에 50여 명이 체포되자 학생들은 구 법원(현재 대구백화점 주차장 자리) 방향과 시청 방향,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동문시장 골목을 지나 청구대학(현재 노보텔대구 자리) 옆길까지 나온 학생이 90명, 시청 쪽으로 간 학생이 150명 정도 되었다.
그러나 법원 쪽으로 몰려간 학생들이 다시 뭉쳐 다음에 취할 행동을 의논하는 도중에 경찰차가 가운데로 뛰어들면서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때 검은 제복의 순경 한 사람이 권총을 치켜들며 위협을 하였다. 학생과 시민들은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90명의 학생 데모대는 제각기 골목으로 사라졌고, 법원 쪽에 있던 데모대도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한편 반대쪽으로 갔던 150여 명은 다시 시청 광장에 집결하였다. “학생 데모의 자유를 달라.”, “학원 내 민주화를 기도하라.”는 구호를 외치던 데모대는 경찰과 충돌한 뒤, 다시 고서점가(古書店街)와 동인파출소 및 대구일보사 쪽으로 갈라졌다.
대구일보사(현재 동인동 대구시청 주차장 자리) 쪽으로 몰려간 100여 명의 학생들은 오후 1시 50분쯤 다시 대오를 정비하였다. 이들은 대열을 정비하여 경북도지사 관사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오(吳) 지사 나오시오, 우리들의 요구를 들으시오.”라고 외친 데모대가 씩씩하게 경북도지사 관사(현재 호수빌딩 자리)를 에워쌌고 마침내 지사와 경찰국장이 나타났다. 여기서 오(吳) 지사가 학생들에게 폭행을 가했는데, 이를 본 김현규 교사는 “어째서 학생들을 때리는 거요. 학생들에게 손대지 마시오.”라고 항의하였다. 오(吳) 지사는 “경북고 학교장이 어느 놈이냐, 즉시 데리고 오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흥분한 한 학생이 지사의 손가락을 깨무는 바람에 지사와 경찰국장은 재빨리 관용차를 타고 사라졌다.
데모대는 다시 한일극장 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경북광유(당시 군부대) 앞에 이르렀을 때 남대구경찰서에서 달려온 수십 명의 경찰과 부딪쳤다. 이때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던 학생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때부터 데모대는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몇 명이 더 경찰에 연행되었다. 남은 70여 명이 군데군데 모여 또 다른 데모를 모색하였으나 더 이상의 데모는 없었다. 이렇게 경북고 학생들의 데모는 1시간 50분 만에 끝나게 되었다.
2월 28일 경북고 학생들은 12시쯤부터 학교(현재 청운맨션 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12시 30분이 되자 등교한 학생들은 모두 교실 밖에서 무리를 지어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대우 학생부위원장은 일단 운영위원회를 소집해서 결의문을 정식으로 채택한 다음 데모를 시작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를 발견한 여러 학생들은 앞 다퉈 당일의 계획을 따지듯이 물어댔고, 교정은 점차 흥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12시 50분쯤 대부분의 학생들이 등교했고, 8백여 명에 이르는 전교생이 조회단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움직임을 알아차린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나와 “곧 극장으로 출발할 테니 1·2학년은 간격 30m로 떨어져 서라.”고 소리치며 학생들을 분산시키려고 애썼지만, 기세가 오른 학생들은 오히려 간격을 좁히면서 “와-”하는 함성과 함께 굳게 뭉쳤다. 일부 학생은 흥분에 못 이겨 단상 앞으로 뛰어나가 빨리 데모를 벌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때 대구고 학생부위원장이 방문하여 대구고 학생들이 이미 교문을 나섰다는 소식을 전했고, 이 소식을 접한 경북고 학생들은 운영위원회를 미처 소집하기도 전에 폭발 단계에 이르렀다.
12시 55분이 되자 부위원장 이대우와 학생위원 안효영이 갑자기 두루마리 결의문을 움켜쥐고 단상에 뛰어 올랐다. 교사들이 제지하려고 했지만, 전교생이 조회단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결의문을 읽어 내려가는 부위원장의 음성은 떨렸고, 흥분이 고조된 8백여 명의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오후 1시 5분, 전교생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선생님들이 만류했으나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데모대는 삼덕우체국 앞에서 수성천변의 유세장으로 가는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 일행과 마주쳤다. 장면 박사를 보는 순간 학생들은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고 장면 후보는 손을 흔들어 응답하였다.
학생들은 달리며 “일요일 등교의 저의가 무엇이냐?”,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쉼 없이 외쳤다. 이들은 대구상고(현재 센트로팰리스 자리), 경북대사대부고 앞에 이르러 동참을 호소한 뒤, 반월당 네거리로 진출하였다. 반월당에서 2분간 정체하자 한 학생이 “도청으로 가자.”, “도(道) 학무(學務) 담당자들에게 우리들의 뜻을 알리자.”고 외치자 데모대는 중앙로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중앙파출소 앞을 지날 때까지도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너무 의외의 사태라 경찰도 미처 손을 쓰지 못하였다. 어느 교통순경은 데모에 방해가 될 차량의 운행을 정지시켜 줄 만큼 데모의 성격을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대구매일신문사(현재 국민은행 대구지점 자리) 앞에 이르렀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원 내에 정치세력 배제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은 그들의 주장을 언론기관에 호소하였다. 1백여 미터에 이르는 데모행렬은 한국은행 대구지점(현재 서울 신탁은행 자리) 모퉁이를 돌아 경상북도 도청(현재 경상감영공원 자리) 마당으로 진입하였다. 이때가 오후 1시 30분경이었다. 경상북도 도청에 몰려든 학생들은 “우리는 정당하다.”, “정의는 살아 있다.”, “일요일 등교의 폐습을 시정하라.”등의 함성을 질렀다. 안효영 학생이 경상북도 도청 중앙정원에 뛰어 올라가 “불합리를 방관할 수 없 다.
땅을 치고 통곡해도 이 소리가 들리지 않나?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관철키 위해 한사코 노력하자.”고 열변을 토했고, 이어서 이대우가 뛰어 올라 결의문을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찰들의 제지로 끝을 맺지 못하였다.
이 무렵 경상북도 도청 구내에 있던 경북경찰국(현재 호수빌딩 자리)에서 최초로 5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데모대가 경상북도 도청 문 동쪽 방향으로 쏠리다가 대부분 도청을 빠져 나올 순간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과 부딪쳐 피를 흘리게 되었다. 몇몇 경찰관은 경찰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구둣발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런 모습을 본 일부 학생들은 자신이 체포된다는 걱정은 떨치고 경찰에 대항하여 동료를 구해내기도 하였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지나가는 버스를 정차시켜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붙들어 버스에 태우기 시작하였다. 경상북도 도청에서 채 나오지 못한 50여 명과 이때 붙들린 65명은 경북경찰국으로 실려 갔다.
도청 제1경비진을 뚫고 나와 다시 한국은행 대구지점(현재 하나은행 대구기업금융센터 자리)으로 달려 온 250여 명의 학생들이 다시 대오를 짜고 “학생데모의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대구시청 쪽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연도(沿道)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이 정의의 대열을 향해 무언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데모대는 다시 자유당 경북도당사(현재 경상감영공원 자리) 앞에 이르렀다. 당국은 수백 명의 경찰 병력을 투입했고 무자비한 곤봉 세례와 억센 주먹이 난무하는 유혈극 속에 50여 명이 체포되자 학생들은 구 법원(현재 대구백화점 주차장 자리) 방향과 시청 방향,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동문시장 골목을 지나 청구대학(현재 노보텔대구 자리) 옆길까지 나온 학생이 90명, 시청 쪽으로 간 학생이 150명 정도 되었다.
그러나 법원 쪽으로 몰려간 학생들이 다시 뭉쳐 다음에 취할 행동을 의논하는 도중에 경찰차가 가운데로 뛰어들면서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때 검은 제복의 순경 한 사람이 권총을 치켜들며 위협을 하였다. 학생과 시민들은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90명의 학생 데모대는 제각기 골목으로 사라졌고, 법원 쪽에 있던 데모대도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한편 반대쪽으로 갔던 150여 명은 다시 시청 광장에 집결하였다. “학생 데모의 자유를 달라.”, “학원 내 민주화를 기도하라.”는 구호를 외치던 데모대는 경찰과 충돌한 뒤, 다시 고서점가(古書店街)와 동인파출소 및 대구일보사 쪽으로 갈라졌다.
대구일보사(현재 동인동 대구시청 주차장 자리) 쪽으로 몰려간 100여 명의 학생들은 오후 1시 50분쯤 다시 대오를 정비하였다. 이들은 대열을 정비하여 경북도지사 관사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오(吳) 지사 나오시오, 우리들의 요구를 들으시오.”라고 외친 데모대가 씩씩하게 경북도지사 관사(현재 호수빌딩 자리)를 에워쌌고 마침내 지사와 경찰국장이 나타났다. 여기서 오(吳) 지사가 학생들에게 폭행을 가했는데, 이를 본 김현규 교사는 “어째서 학생들을 때리는 거요. 학생들에게 손대지 마시오.”라고 항의하였다. 오(吳) 지사는 “경북고 학교장이 어느 놈이냐, 즉시 데리고 오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흥분한 한 학생이 지사의 손가락을 깨무는 바람에 지사와 경찰국장은 재빨리 관용차를 타고 사라졌다.
데모대는 다시 한일극장 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경북광유(당시 군부대) 앞에 이르렀을 때 남대구경찰서에서 달려온 수십 명의 경찰과 부딪쳤다. 이때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던 학생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때부터 데모대는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몇 명이 더 경찰에 연행되었다. 남은 70여 명이 군데군데 모여 또 다른 데모를 모색하였으나 더 이상의 데모는 없었다. 이렇게 경북고 학생들의 데모는 1시간 50분 만에 끝나게 되었다.
대구고등학교
2월 27일 대구고등학교에서는 이튿날(일요일) 교내 운동시합(뒤에 토끼사냥으로 바뀌었음)을 하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등교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2월 25일 다른 학교에서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져 시끄럽던 때라 학생들은 “이런 부당한 처사는 따를 수 없다.”, “정치 이용물이 될 수 없다.”고 거칠게 항의하였으나, “내일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모두 처벌 받는다.”는 교사의 대답이 있을 뿐이었다. 학생대의원들이 학교장에게도 행사 연기를 호소하였지만 소용없었고, 정당정치의 원칙과 유권자들이 선거 기간에 취해야 할 태도 등 공민수업을 통해 배운 내용을 들어 부당성을 지적해도 소용없었다.
방과 후 대구고 학생위원들은 평소 친분이 있던 경북고·경북대사대부고 학생위원들과 자유당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대책을 의논한 뒤, 대구고와 경북고는 28일 데모를 결행하기로 합의하였다. 두 학교의 등교 시간이 정오이므로 그때그때 상황을 전화로 연락하고, 오후 1시 운동장에 모여 결의문을 낭독한 후 바로 데모에 돌입한 뒤, 반월당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2월 28일 아침 10시경, 학교 근처에서 긴급 학생위원회를 개최하고 데모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던 중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결의문이 외부에 발각되어 소각됨으로써 초긴장 상태로 돌입하였다.
대구고의 결의문이 경북고와 같으면 사전에 모의한 결과가 드러나게 되므로 별도의 결의문을 작성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는데, 경북대사대부고의 최용호 부위원장에게 부탁하여 작성된 결의문을 정서하던 과정에서 발각되어 소각 당하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경북고 결의문 초안 원고를 낭독하다가 그것마저 교사들에게 제지를 받아 교무실에 억류되었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낮 12시가 되었으나 학교에서는 토끼사냥을 할 준비를 하지 않고 학생들을 귀가시키지도 않은 채 붙들어 놓고만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손진홍 학생위원장이 경북고등학교로 갔다. 경북고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손진홍을 만난 경북고 학생대표들은, 대대장이 반대를 해서 경북고의 참여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였고, 손진홍은 흥분된 어조로 “우리는 계획대로 데모를 감행하겠다.”고 통고하면서 경북고도 서두를 것을 종용하였다.
손진홍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중 경북고생들이 학교 밖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료학생의 자전거를 타고 정신없이 학교를 향해 달렸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가자 가자.”, “우리도 민주 대열에 합류하자.”하고 외치며 교문을 뛰어들었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뛰쳐나갔으나 교사들의 저지로 100여 명만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길거리로 나선 1차 선발대 학생들은 중앙로 쪽으로 마구 뛰었다. 경북여고 앞을 지나 반월당을 거쳐 중앙파출소(현재 중앙치안센터 자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우리에게 인류애를 달라.”는 함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때마침 경북고 데모대가 중앙파출소 앞을 지나간 후 비상령이 내려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던 중이라 이를 뚫지 못하고 경찰방망이 세례에 쫓겨 학교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차 선발대가 교문을 나간 뒤 학교 안에 남은 부위원장 장주효는 조회단에 뛰어올라가 경북고와 같은 결의문을 읽다가 교사들의 제지를 받고 교무실로 끌려갔다. 그러던 중 경찰의 제지로 학교에 쫓겨 온 학생과 남은 학생들이 합류해 대열을 갖추고 다시 교문을 나섰다. 교사들도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큰 길로 나온 학생들은 질서 있게 행진하였다. 대열의 좌·우측에는 주로 듬직한 학생들이 서서 외부의 제지를 막기로 하였다. 이들은 남문시장 네거리에 이르러 경찰과 마주쳤다. 경찰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들고 소방차도 경적을 울려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어디선가 정·사복경찰관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방망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이면서도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를 외치며 도청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격려하거나 도망치는 학생들을 숨겨주었다. 이처럼 격렬한 대치 속에서도 40~50명의 학생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대구역 앞에 다시 모여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고 외치다 결국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다.
방과 후 대구고 학생위원들은 평소 친분이 있던 경북고·경북대사대부고 학생위원들과 자유당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대책을 의논한 뒤, 대구고와 경북고는 28일 데모를 결행하기로 합의하였다. 두 학교의 등교 시간이 정오이므로 그때그때 상황을 전화로 연락하고, 오후 1시 운동장에 모여 결의문을 낭독한 후 바로 데모에 돌입한 뒤, 반월당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2월 28일 아침 10시경, 학교 근처에서 긴급 학생위원회를 개최하고 데모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던 중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결의문이 외부에 발각되어 소각됨으로써 초긴장 상태로 돌입하였다.
대구고의 결의문이 경북고와 같으면 사전에 모의한 결과가 드러나게 되므로 별도의 결의문을 작성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는데, 경북대사대부고의 최용호 부위원장에게 부탁하여 작성된 결의문을 정서하던 과정에서 발각되어 소각 당하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경북고 결의문 초안 원고를 낭독하다가 그것마저 교사들에게 제지를 받아 교무실에 억류되었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낮 12시가 되었으나 학교에서는 토끼사냥을 할 준비를 하지 않고 학생들을 귀가시키지도 않은 채 붙들어 놓고만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손진홍 학생위원장이 경북고등학교로 갔다. 경북고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손진홍을 만난 경북고 학생대표들은, 대대장이 반대를 해서 경북고의 참여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였고, 손진홍은 흥분된 어조로 “우리는 계획대로 데모를 감행하겠다.”고 통고하면서 경북고도 서두를 것을 종용하였다.
손진홍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중 경북고생들이 학교 밖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료학생의 자전거를 타고 정신없이 학교를 향해 달렸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가자 가자.”, “우리도 민주 대열에 합류하자.”하고 외치며 교문을 뛰어들었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뛰쳐나갔으나 교사들의 저지로 100여 명만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길거리로 나선 1차 선발대 학생들은 중앙로 쪽으로 마구 뛰었다. 경북여고 앞을 지나 반월당을 거쳐 중앙파출소(현재 중앙치안센터 자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우리에게 인류애를 달라.”는 함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때마침 경북고 데모대가 중앙파출소 앞을 지나간 후 비상령이 내려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던 중이라 이를 뚫지 못하고 경찰방망이 세례에 쫓겨 학교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차 선발대가 교문을 나간 뒤 학교 안에 남은 부위원장 장주효는 조회단에 뛰어올라가 경북고와 같은 결의문을 읽다가 교사들의 제지를 받고 교무실로 끌려갔다. 그러던 중 경찰의 제지로 학교에 쫓겨 온 학생과 남은 학생들이 합류해 대열을 갖추고 다시 교문을 나섰다. 교사들도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큰 길로 나온 학생들은 질서 있게 행진하였다. 대열의 좌·우측에는 주로 듬직한 학생들이 서서 외부의 제지를 막기로 하였다. 이들은 남문시장 네거리에 이르러 경찰과 마주쳤다. 경찰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들고 소방차도 경적을 울려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어디선가 정·사복경찰관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방망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이면서도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를 외치며 도청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격려하거나 도망치는 학생들을 숨겨주었다. 이처럼 격렬한 대치 속에서도 40~50명의 학생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대구역 앞에 다시 모여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고 외치다 결국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는 2월 28일의 거사가 있기 전에 이미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노가바) 사건으로 교내·외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2월 16일 1학년 학생이었던 오석수· 김영길·유효길 3명은 당시 유행하던“유정천리(有情千里)”라는 노래(남백송노래)의 가사를 전날 서거한 조병옥 박사를 애도하는 내용의 것으로 바꿔 칠판에 적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海公)선생 뒤를 따라 /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가네/ 가도 가도 가망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노래는 삽시간에 학교 안에 퍼지고, 다시 대구 시내로 번져나갔다. 급기야 그 내용이『동아일보』에 가사와 함께 소개되자 전국적으로 알려져 어린 초등학생이나 시골의 농민들까지 애창하게 되었다.
경북대 사대부고에서는 2월 27일 제9회 졸업식이 끝난 후 종례 시간에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담임교사는 2월 28일 12시 30분까지 이유 불문하고 전원 등교해서 청소를 한 후에 재미있는 게임을 한다고 전달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청소와 게임이었으나, 그 진짜 이유는 수성 천변에서 있을 야당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자유당 독재정권의 음흉한 술책이었음을 학생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대해서는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은 채 하교하였다.
이날 오후 대구고등학교 학생위원장 손진홍이 경북대사대부고의 부위원장 최용호를 찾아와 당국의 부당한 일요일 등교 지시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함께 수성 천변에서 열리고 있던 자유당 유세장에 들렀다가 저녁 무렵 경북고등학교 학생부위원장 이대우의 집에 합류하여 일요일 등교 반대 데모를 위한 3개교 연합 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28일 새벽 최용호는 문태길·김영대 등 학생회 간부들을 찾아 나섰다. 타교에 비해 공감대의 형성과 여론 수렴 시간이 부족했기에 간부들은 일찍 학교에 나가 긴급회의를 열어 행동 계획을 논의키로 하였다. 또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거사 계획을 사전에『AP·AFP·UPI』등 해외의 유명통신사에 알려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자는 논의도 하였다.
11시경 과학실에 이들을 포함하여 박재철·김관희·손원익을 비롯한 대의원들이 모여 긴급 학도호국단 간부회의가 열렸고, 참석자들은 장시간 논의한 끝에 일요일에 등교 시킨 저의를 따지고자 도지사를 직접 항의 방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때 교무주임이 “젓가락 하나로 태평양 물을 휘저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희들이 커서 실력을 길러 깨끗하고 바른 사회를 만들도록 해라. 지금은 공부할 때이지, 데모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달랬으나 간부들은 데모를 강행하기로 결의하였다. 2학년 3반 교실에서 2학년 240명과 1학년 일부 학생들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시국을 개탄하고 일요일 등교의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행동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어둠이 짙어감에 따라 학생들을 데리러 오는 학부형들이 쇄도하고, 기자들의 카메라가 농성장 안팎에서 터지기 시작하였다. 데모를 강행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막으려는 학부형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험악한 판국이 되었다.
극에 달한 학생들은 비좁은 농성장을 빠져 나와 운동장에 집결하였다. 농성 4시간이 지난 밤 7시에 2백여 명의 학생들은 부모와 교사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담장을 넘어 대열을 갖추고 데모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삼덕네거리와 대학병원(현재 경북대학교병원 자리)을 지나 경상북도지사 관사와 자유당 경북도당사에서 데모를 하다가 급거 출동한 경찰과 충돌하여 부상을 입거나 연행되었다.
남은 학생들은 다시 규합하여 중앙로에 있던 대구매일신문사를 찾아가 결의문을 전달하였고, 이때 많은 학생들이 파출소로 끌려갔다. 연행되지 않은 학생 대부분이 남의 집으로 피신해 시민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다. 경찰에 끌려갔던 학생들은 조사를 받은 뒤 밤 11시경에 귀가했으며, 주동 학생 몇 명은 담임교사 집에서 보호를 받았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海公)선생 뒤를 따라 /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가네/ 가도 가도 가망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노래는 삽시간에 학교 안에 퍼지고, 다시 대구 시내로 번져나갔다. 급기야 그 내용이『동아일보』에 가사와 함께 소개되자 전국적으로 알려져 어린 초등학생이나 시골의 농민들까지 애창하게 되었다.
경북대 사대부고에서는 2월 27일 제9회 졸업식이 끝난 후 종례 시간에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담임교사는 2월 28일 12시 30분까지 이유 불문하고 전원 등교해서 청소를 한 후에 재미있는 게임을 한다고 전달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청소와 게임이었으나, 그 진짜 이유는 수성 천변에서 있을 야당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자유당 독재정권의 음흉한 술책이었음을 학생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대해서는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은 채 하교하였다.
이날 오후 대구고등학교 학생위원장 손진홍이 경북대사대부고의 부위원장 최용호를 찾아와 당국의 부당한 일요일 등교 지시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함께 수성 천변에서 열리고 있던 자유당 유세장에 들렀다가 저녁 무렵 경북고등학교 학생부위원장 이대우의 집에 합류하여 일요일 등교 반대 데모를 위한 3개교 연합 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28일 새벽 최용호는 문태길·김영대 등 학생회 간부들을 찾아 나섰다. 타교에 비해 공감대의 형성과 여론 수렴 시간이 부족했기에 간부들은 일찍 학교에 나가 긴급회의를 열어 행동 계획을 논의키로 하였다. 또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거사 계획을 사전에『AP·AFP·UPI』등 해외의 유명통신사에 알려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자는 논의도 하였다.
11시경 과학실에 이들을 포함하여 박재철·김관희·손원익을 비롯한 대의원들이 모여 긴급 학도호국단 간부회의가 열렸고, 참석자들은 장시간 논의한 끝에 일요일에 등교 시킨 저의를 따지고자 도지사를 직접 항의 방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때 교무주임이 “젓가락 하나로 태평양 물을 휘저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희들이 커서 실력을 길러 깨끗하고 바른 사회를 만들도록 해라. 지금은 공부할 때이지, 데모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달랬으나 간부들은 데모를 강행하기로 결의하였다. 2학년 3반 교실에서 2학년 240명과 1학년 일부 학생들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시국을 개탄하고 일요일 등교의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행동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어둠이 짙어감에 따라 학생들을 데리러 오는 학부형들이 쇄도하고, 기자들의 카메라가 농성장 안팎에서 터지기 시작하였다. 데모를 강행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막으려는 학부형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험악한 판국이 되었다.
극에 달한 학생들은 비좁은 농성장을 빠져 나와 운동장에 집결하였다. 농성 4시간이 지난 밤 7시에 2백여 명의 학생들은 부모와 교사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담장을 넘어 대열을 갖추고 데모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삼덕네거리와 대학병원(현재 경북대학교병원 자리)을 지나 경상북도지사 관사와 자유당 경북도당사에서 데모를 하다가 급거 출동한 경찰과 충돌하여 부상을 입거나 연행되었다.
남은 학생들은 다시 규합하여 중앙로에 있던 대구매일신문사를 찾아가 결의문을 전달하였고, 이때 많은 학생들이 파출소로 끌려갔다. 연행되지 않은 학생 대부분이 남의 집으로 피신해 시민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다. 경찰에 끌려갔던 학생들은 조사를 받은 뒤 밤 11시경에 귀가했으며, 주동 학생 몇 명은 담임교사 집에서 보호를 받았다.
경북여자고등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에도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경북여고 학생들은 사은회를 이유로 일요일 낮 12시까지 등교하게 되었다. 이 날에 도(道) 장학사의 특별연수 강의가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온 전교생이 강의를 들으려고 강당에 모였는데, 연주와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등 분위기가 산만해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채 끝났다. 이때 신구자 학생회장이 앞으로 나가 일요일 등교의 부당성을 일일이 지적하며 모두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가자, 수성 천변으로.”, “경고생들도 나섰 단다.”등의 함성을 지르며 일어섰다.
당시 다른 학교의 데모 소식에 놀란 학교당국은 전체 교사들을 동원해 정문을 지키며 만일 발생할지도 모르는 학생들의 단체 행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 7백명의 전교생이 갑자기 정문을 향해 뛰어나오자 교사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학교 담을 넘으며 교문을 빠져 나온 학생들의 대부분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약 1백여 명은 대열을 지어 행진하며 이들이 대구향교를 지나 삼덕네거리를 거쳐 수성 천변으로 향해 달려갔다. 여학생들은 “일요일 수업을 폐지하라.”고 외치며 수성교로 행진하던 중 경찰의 제지를 받아 30여 명은 연행되고 나머지는 해산되었다.
당시 다른 학교의 데모 소식에 놀란 학교당국은 전체 교사들을 동원해 정문을 지키며 만일 발생할지도 모르는 학생들의 단체 행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 7백명의 전교생이 갑자기 정문을 향해 뛰어나오자 교사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학교 담을 넘으며 교문을 빠져 나온 학생들의 대부분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약 1백여 명은 대열을 지어 행진하며 이들이 대구향교를 지나 삼덕네거리를 거쳐 수성 천변으로 향해 달려갔다. 여학생들은 “일요일 수업을 폐지하라.”고 외치며 수성교로 행진하던 중 경찰의 제지를 받아 30여 명은 연행되고 나머지는 해산되었다.
대구여자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현재 한국은행 대구·경북 본부 자리)에서는 2월 27일, 각반 담임 선생님들이 종례시간에 내일 일요일이지만 상부 지시가 있으니 등교하라고 말했다. 이유를 묻는 학생들에게 졸업생 송별회와 무용발표회가 있으니 모두 나와야 하며, 나오지 않는 학생은 모두 결석 처리한다고 했다. 그러나 2월 28일 학교 당국은 학교에 나온 학생들을 모두 강당에 모아놓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신학기를 대비한 교내 청소를 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신입생 환영행사 절차에 필요하다며 교가 연습을 하던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늘 수성 천변에서 민주당 선거 연설이 있는데, 거기에 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둬 놓았단다!”
학생들이 이 소리를 듣고 “우우~”하며 야유를 퍼붓자 “경고생들이 데모한단다!”는 소리와 함께 “우리도 나가자!”하며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교문은 선생님들이 지키고 있어 교문을 밀치고 담을 넘으면서 3백여 명은 삼덕네거리로 달려가다가 경북여고학생들과 합류하여 수성 천변 유세장으로 가고, 일부 학생들은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입생 환영행사 절차에 필요하다며 교가 연습을 하던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늘 수성 천변에서 민주당 선거 연설이 있는데, 거기에 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둬 놓았단다!”
학생들이 이 소리를 듣고 “우우~”하며 야유를 퍼붓자 “경고생들이 데모한단다!”는 소리와 함께 “우리도 나가자!”하며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교문은 선생님들이 지키고 있어 교문을 밀치고 담을 넘으면서 3백여 명은 삼덕네거리로 달려가다가 경북여고학생들과 합류하여 수성 천변 유세장으로 가고, 일부 학생들은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대구공업고등학교
2월 27일 오전 대구공업고등학교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갑자기 일제고사를 치른다는 이유로 일요일 등교를 지시하였다. 학생들의 불평이 이어졌고, “본관 건물에 있는 미군부대가 이전하기 때문에 교내 청소를 하려는 것이겠지.”, “민주당 연설회 때문인가?”등 여러 가지 짐작이 난무하였다.
2월 28일, 학생과장의 지시로 1·2학년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노래자랑대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아! 목동”을 부른 김호생(화학과 2) 학생이 1등을 차지하였고, 빵과 찹쌀떡 2개씩을 나누어 주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 했으나 어수선한 분위기를 알아챈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교무실 옆 도서실에서는 각 학년 반장 주재로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학생 자율을 탄압하는 교장은 물러나라.”는 성명을 냈다. 또 일요일 등교 지시로 국·공립 중·고등학생들이 정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격분한 2백여 명의 학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교내 곳곳에서 사복경찰과 교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위원장을 선두로 한 대열이 신암초등학교 정문 쪽으로 나서며 “학생 탄압을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교사들이 이를 말리자 일부 학생들은 경북대학교 정문 쪽으로, 일부는 신도극장 쪽으로 행진을 시도하였으나 신암교를 건너는 순간 경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되었다. 출동한 경찰이 사정없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본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2월 28일, 학생과장의 지시로 1·2학년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노래자랑대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아! 목동”을 부른 김호생(화학과 2) 학생이 1등을 차지하였고, 빵과 찹쌀떡 2개씩을 나누어 주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 했으나 어수선한 분위기를 알아챈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교무실 옆 도서실에서는 각 학년 반장 주재로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학생 자율을 탄압하는 교장은 물러나라.”는 성명을 냈다. 또 일요일 등교 지시로 국·공립 중·고등학생들이 정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격분한 2백여 명의 학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교내 곳곳에서 사복경찰과 교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위원장을 선두로 한 대열이 신암초등학교 정문 쪽으로 나서며 “학생 탄압을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교사들이 이를 말리자 일부 학생들은 경북대학교 정문 쪽으로, 일부는 신도극장 쪽으로 행진을 시도하였으나 신암교를 건너는 순간 경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되었다. 출동한 경찰이 사정없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본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대구농림고등학교
대구농림고등학교(현재 대구은행·대구광역시교육청 자리)에서는 여러 차례 교직원회의를 열고 28일 일요일 등교 시 졸업식 예행연습과 음악 지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학생들의 반발을 우려하면서 등교 지시를 하였으나 이치에 어긋나고 사리에 맞지 않는 명목상의 등교 지시인지라 28일 학교에 나온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대구농고 학생들도 데모를 계획하였으나, 악대부·정구부·씨름부 등은 서클별 체육행사 지도를 핑계로 강당에 집합해 있었고, 일부 학생들은 과별로 농장·축사·묘포장 등에서 현장실습 명목으로 분산되어 데모 계획을 봉쇄당했을 뿐만 아니라,학교장의 간곡한 만류로 데모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학생들의 신변 안전을 걱정하는 학교장의 심정을 학생 대표들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런데 전체 학생들이 참여하는 데모는 무산되었으나 불의를 규탄하는 정의감은 살아있어 많은 학생들이 다른 학교의 행진에 동참 하거나 교복을 사복으로 바꿔 입고 수성 천변에서 열린 민주당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물론 대구농고 학생들도 데모를 계획하였으나, 악대부·정구부·씨름부 등은 서클별 체육행사 지도를 핑계로 강당에 집합해 있었고, 일부 학생들은 과별로 농장·축사·묘포장 등에서 현장실습 명목으로 분산되어 데모 계획을 봉쇄당했을 뿐만 아니라,학교장의 간곡한 만류로 데모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학생들의 신변 안전을 걱정하는 학교장의 심정을 학생 대표들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런데 전체 학생들이 참여하는 데모는 무산되었으나 불의를 규탄하는 정의감은 살아있어 많은 학생들이 다른 학교의 행진에 동참 하거나 교복을 사복으로 바꿔 입고 수성 천변에서 열린 민주당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현재 센트로팰리스 자리)에서도 2월 27일 일요일 등교 지시가 있었다. 일요일이지만 졸업식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2월 28일 등교한 학생 80여 명은 강당에 들어가기 직전, 정문에서 교사들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지키고 있었으므로 옆에 있는 사대부고 담을 넘거나 남쪽 담을 넘어서 수성 천변 유세장으로 갔거나 경북고 데모 대열에 참여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강당에서 예행연습을 하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경북고등학교 데모대의 함성을 듣게 되었다.
일요일 등교로 불만이 가득했으므로 강당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학생들은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가거나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방관했지만, 몇몇은 야단을 치면서 문을 닫아걸었다. 결국 졸업식 예행연습은 어수선하게 끝나고 뿔뿔이 헤어져 야당후보 연설을 듣기 위해 수성 천변으로 가거나 데모대에 합세하였다.
연설회장으로 간 학생들은 학교에서 받은 협박 때문에 모자를 벗고 주위를 살피면서 연설을 들었다.
2월 28일 대구 시내를 휩쓸었던 학생데모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이튿날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하루 전에 침묵했던 대구상고에서 학생들의 집단 데모가 시작되었다. 대구상고 학생들은 “28일 데모에 참여한 경북고와 대구고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있으니 석방을 호소하러 가자.”는 명분을 내걸었다. 오전 9시쯤 학생 대표들은 데모를 하기로 합의한 후 첫 시간 수업이 끝나자 모두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동쪽과 남쪽 담을 넘어 삼덕네거리 부근에서 집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막상 행동으로 옮겼을 때는 20여 명이 담을 넘었을 뿐 나머지 학생들은 교사와 경찰들에 의해 제지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남대구경찰서에서는 데모 신고를 접하자 즉시 모든 경찰을 비상소집하여 출동시켰다. 학교 밖 진출에 실패한 후 교실에 수용된 학생들은 “경찰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이들을 비난하였다. 또 뜻을 이루지 못한 학생위원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7명의 대표를 뽑고 “경찰에서 경북고와 대구고의 학생들을 석방시키지 않는 한 데모를 계속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7명의 학생 대표들은 경찰과 동행하여 구속된 학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틀에 걸쳐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데모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일부 학생들은 강당에서 예행연습을 하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경북고등학교 데모대의 함성을 듣게 되었다.
일요일 등교로 불만이 가득했으므로 강당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학생들은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가거나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방관했지만, 몇몇은 야단을 치면서 문을 닫아걸었다. 결국 졸업식 예행연습은 어수선하게 끝나고 뿔뿔이 헤어져 야당후보 연설을 듣기 위해 수성 천변으로 가거나 데모대에 합세하였다.
연설회장으로 간 학생들은 학교에서 받은 협박 때문에 모자를 벗고 주위를 살피면서 연설을 들었다.
2월 28일 대구 시내를 휩쓸었던 학생데모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이튿날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하루 전에 침묵했던 대구상고에서 학생들의 집단 데모가 시작되었다. 대구상고 학생들은 “28일 데모에 참여한 경북고와 대구고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있으니 석방을 호소하러 가자.”는 명분을 내걸었다. 오전 9시쯤 학생 대표들은 데모를 하기로 합의한 후 첫 시간 수업이 끝나자 모두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동쪽과 남쪽 담을 넘어 삼덕네거리 부근에서 집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막상 행동으로 옮겼을 때는 20여 명이 담을 넘었을 뿐 나머지 학생들은 교사와 경찰들에 의해 제지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남대구경찰서에서는 데모 신고를 접하자 즉시 모든 경찰을 비상소집하여 출동시켰다. 학교 밖 진출에 실패한 후 교실에 수용된 학생들은 “경찰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이들을 비난하였다. 또 뜻을 이루지 못한 학생위원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7명의 대표를 뽑고 “경찰에서 경북고와 대구고의 학생들을 석방시키지 않는 한 데모를 계속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7명의 학생 대표들은 경찰과 동행하여 구속된 학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틀에 걸쳐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데모는 이렇게 끝이 났다.
학교별 시위로
1960년 2·28 당시 시위로와 주요한 시위계획은 2월 27일 밤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의 자취방에서 그려졌다. 특히, 이날 밤 모의에서 경북고와 대구고는 시위 전에 상호 연락을 취하여 시간을 맞추기로 하고 두 학교 학생들은 28일 오후 1시 반월당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당시 경북고는 현재 중구 대봉동 대봉도서관과 청운맨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경북고에서 시위대가 출발해 반월당으로 가는 길목에 대구상고(현 상원고, 현재 경남센트로팰리스 자리), 경대사대부고와 자연스럽게 합류할 계획이었고 남구 대명동에 있는 대구고와는 반월당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28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면서 각 학교별 상황은 계획과는 다르게 움직였고, 각 시위로는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