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리벤지
상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뚝배기에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퍼져 나갔다. 갓 퍼낸 쌀밥의 단맛과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구이의 기름진 온기가 혀끝에 감돌았지만, 찬물이 섞여 미지근해질수록 입안의 음식은 이도 저도 아닌 헛헛한 맛으로 변해갔다. 수저가 놋그릇에 부딪히며 툭툭 투박한 소리를 냈다. 겉은 따스하지만 어딘가 팍팍하게 느껴지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목이 메어올 때마다 나는 기계적으로 미역국을 한 모금씩 들이켰다.
문틈 사이로 마루 너머 낡은 석유난로가 뱉어내는 눅눅하고 매캐한 온열이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구 시내의 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번잡했고, 나지막한 기와지붕과 적벽돌 건물들 사이로 차가운 2월의 겨울 안개가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선거철이 다가오든 말든, 거리는 그저 매일 같은 속도로 흘러갈 뿐이었다. 담벼락마다 덕지덕지 붙은 기호 1번 자유당의 붉고 푸른 포스터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나는 입안에 남은 김치의 매콤한 단맛을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가요나 신문 구석의 4컷 만화만이 이 서스펜스 없는 일상에서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즐거움이었다.
재한이가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밥상머리에 앉아 있던 나를 밀어내듯 촉구했다. 잠이 덜 깨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졸음과 조급함이 뒤섞여 있었다.
“으...음, 너도 늦겠구나, 태만아.”
그는 마치 잠꼬대를 하듯 내 등을 바삐 밀어대며 어서 가자고 보챘지만, 정작 본인의 몸은 여전히 꿈나라에 걸쳐 있는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무거운 손길을 억지로 버텨내며, 나는 남은 밥 한 숟가락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소리쳤다.
“으음음... 이것만!”
집을 나서기 전, 일요일 아침에 갑자기 소환당한 학교에 가기 전 이 따뜻한 밥 한 술 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재한이의 마른 손가락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방벽에 걸린 쾌청한 2월 28일 일요일 달력에 고정되어 있었다. 학기말 시험 및 임시 수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목. 오늘 오후 대구천변에서 열릴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정부가 내린 기습 등교 명령이었다.
"야, 김태만! 진짜 정문 닫힌다니까?“
잠이 덜 깨 가라앉은 재한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맴돌았다. 등 뒤에서 밀어붙이는 그의 손길에 상체가 힘없이 흔들렸지만, 나는 버팀목이라도 붙잡듯 가방끈을 쥔 손가락 끝 마디에 힘을 주었다.
마루 문을 열자 찬 칼바람이 훅 끼쳐 들어와 방안 온기에 녹아 있던 목덜미에 땀처럼 들러붙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번잡한 대구의 아침 소음이 문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잇, 이 방법뿐인가.“
다급해진 재한이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마당 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엔 대문 옆을 지키듯 세워진, 녹슬고 칠이 벗겨진 아버지의 낡은 생활 자전거 한 대가 서 있었다. 앞바구니에는 어머니가 장바구니로 쓰시던 비닐봉지가 삐죽이 나와 있고, 체인에는 까만 기름때가 가득 묻어 있는 물건이었다.
"야 이 놈들아! 밥 먹자마자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냐!“
등 뒤에서 숭늉 그릇을 들고 나오시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따스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당 안을 징하게 울렸다.
"미안해요 어머니! 오늘 좀 급해서요!“
재한이는 사과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낡은 안장 위로 잽싸게 올라탔다. 뒤이어 나도 삐걱거리는 짐받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그의 허리춤을 생명줄처럼 꽉 쥐었다.
끼이익, 비명을 지르는 페달을 재한이가 미친 듯이 밟아대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지나 덜컹거리는 바퀴를 따라 대구의 매서운 2월 아침 공기가 우리 뺨을 거칠게 때리며 스쳐 지나갔다. 낮은 건물 숲 사이로 쏟아지는 뿌연 겨울 햇살 속을, 우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우당탕탕!’
“세이프!”
“얌마, 하나도 안 세이프 하거든?”
간발의 차로 턱을 넘으며 교문을 통과하는 순간, 철제 프레임이 비명을 질렀다. 나와 재한이, 그리고 자전거는 마치 서로를 밀어내는 각자 성질이 다른 원소들처럼 사방으로 분리되어 나뒹굴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미끄러졌다. 쇠가 긁히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자전거 바퀴는 여전히 공중에서 허무하게 헛돌고 있었고, 짐받이에 매달려 있던 바닥 흙먼지가 아스팔트 위로 흩어졌다. 재한이는 무릎을 움켜쥔 채 비명을 삼키고 있었고, 나 역시 쓸린 손바닥의 화끈거리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뿌연 안개 너머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교사의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가장 먼저 주머니에서 미끄러져 나온 소중한 단어장을 확인했다. 다행히 멀쩡했다. 바닥의 차가운 열기와 땀이 섞여 묘한 냄새가 올라오는 교문 한복판에서, 우리는 널브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학교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진 않는다. 결국 이곳도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니까. 천장에 매달린 낡은 선풍기 날개가 멈춰 있는 교실, 칠판을 사각사각 긁어내리는 분필 가루 냄새, 그리고 추위로 굳은 책상 나무에 살갗이 들러붙는 불쾌한 촉감까지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정적을 깨고 교실 앞문이 거칠게 열렸다. 불쑥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담당 과목 선생이 아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었다.
하얀 셔츠 깃 위로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삐딱하게 매여 있는 넥타이. 칠판을 채우던 분필 소리가 뚝 끊기고, 졸음으로 흐릿하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교단 앞으로 쏠렸다. 평소라면 복도에서부터 뚜벅거리는 구두 굽 소리를 요란하게 냈을 그가, 오늘은 유독 무거운 침묵을 걸치고 교단에 섰다.
손에 쥔 출석부를 탁 소리 나게 교탁 위에 내려놓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쌤, 저희를 일요일에도 한 번 더 보고 싶으셨구나!”
재한이가 특유의 넉살 좋은 말투로 분위기를 띄우며 담임 선생님을 맞이했다. 평소 같았으면 싱긋 웃으며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쳐 주었을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는 재한이의 장난을 완전히 못 들은 체하며, 굳은 표정으로 교탁 양끝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무거운 침묵이 교실 안을 짓눌렀다. 창밖의 으스스한 겨울 바람소리만이 유독 크게 들리는 가운데,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한 첫마디를 꺼냈다.
“오늘 대구천변 야당 유세장에 기웃거릴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라. 너희는 그저 학업에만 전념해야 한다. 학교 밖에서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면 정학이나 퇴학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
건조하고 차가운 경고였다. 자유당 정권의 압박을 받은 학교 측의 정형화된 지시였다.
교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였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대구의 차가운 바람마저 교실 문턱에서 멈춰 선 것만 같은 기묘한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흘러갔다.
“뭔가 인상 깊은 일요일 아침이구만.”
선생님이 굳은 표정으로 교실을 빠져나가자, 재한이가 내 쪽으로 상체를 쓱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의 이마에는 아까 자전거에서 구르며 묻은 흙먼지가 아직 거뭇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 사건사고가 많다, 태만아.”
“그건 너 때문이잖아.”
내가 책상 밑으로 교과서를 만지작거리며 핀잔을 주자, 재한이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으름 피운 게 누군데.”
재한이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따뜻한 방안 밥상에 붙어앉아 미역국을 들이키며 멍하니 앉아 있던 건 나였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아침의 그 소란스러웠던 자전거 질주, 무릎에 묻은 흙먼지, 그리고 방금 교실을 얼어붙게 만든 선생님의 낯선 경고까지. 웅성거리는 이 도시의 어수선함이 꽉 닫힌 교실 창문 틈새로 끊임없이 기어들어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근데… 선거 때문에 일요일에 학교에 가두는 게 말이 되냐?”
내가 턱을 괸 채 창밖의 낡은 건물들을 바라보며 툭 던지듯 물었다. 내게 정치나 선거란 그저 신문면을 가득 채운 귀찮은 활자이자, 매일 걷는 중앙로 거리의 포스터 색깔이 바뀌는 정도의 일에 불과했다.
“어, 문제 있어.”
항상 가벼운 농담을 툭툭 던지던 재한이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으응?”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재한이는 의자 밑에 던져두었던 가방끈을 단단히 고쳐 쥐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가방끈을 쥔 녀석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시위하러 나갈 거야, 태만아, 자유를 찾으러.”
교실 안은 갑작스러운 일요일 등교에 불만을 토로하는 아이들의 소음으로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재한이가 내뱉은 '자유'라는 단어만큼은 내 귀에 너무도 또렷하게 와서 꽂혔다.
“잠깐만, 너 미쳤어? 어젯밤부터 무슨 공작이라도 공모한 거야?”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튀어 나갔다. 재한이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침까지만 해도 집 마당에서 낡은 자전거를 끌고 나와 교문을 넘으며 낄낄거리던 녀석이었다. 먼지로 범벅이 된 채 웃던 그 일상에서, 갑자기 시위니, 뭐니 하는 거창한 단어로 건너가는 그 간극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어제 밤에 다른 학교 애들이랑 약속했어.”
재한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녀석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니, 좋았잖아. 평소와 같이 지냈잖아!”
나는 억울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받아쳤다. 집에서 먹던 따뜻한 된장찌개, 미역국을 삼키며 나누던 사소한 대화,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일요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한 일상이치 않나.
“가만히 있으면……”
재한이가 낮게 읊조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태만아. 계속 우리를 가둬둘 거야. 부통령 유세장 못 가시게 하려고 일요일에 학교로 불러내는 게 정상이냐고. 오늘 입 닫고 있으면, 내일은 우리가 진짜 말 한마디 못 하는 세상이 될 거다.”
녀석의 마른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창밖으로 늘어선 대구 시내의 건물들이 마치 이 도시를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거대한 창살처럼 보였다.
“같이 가자고 안 해.”
재한은 내 어깨를 가볍게 한 번 툭 치고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넌 그냥…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어라.”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교실 앞문으로 걸어 나가는 녀석의 등 뒤로, 의자를 드르륵 끄는 아이들의 소음과 “출동이다!” 하는 함성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휩쓸려 나갔다.
교실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멍하니 내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녀석을 붙잡을 수도, 그렇다고 선뜻 따라나설 수도 없는 먹먹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책상 귀퉁이에는 아침에 집을 나서며 손에 묻었던 기름진 얼룩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 재한이와 수많은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부수고 도로로 뛰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대구의 서늘한 바람 속으로 녀석의 교복 셔츠가 서서히 흐려졌다.
“쯧, 지가 뭐가 잘났다고.”
나는 툴툴대며 집에서 끌고 나온 낡은 자전거를 터덜터덜 끌고 교문을 나왔다. 분명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어야 했다. 페달을 밟아 따뜻한 석유난로가 있는 방으로,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무리 핸들을 꺾으려 해도, 내 발길은 자꾸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녀석이 두고 간 서분한 어깨의 온기, "평소처럼 잘 지내라"던 그 차가운 한마디가 발목에 사슬처럼 걸려 끌려갔다. 집으로 가는 반대 방향,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번져나오는 중앙로 쪽으로 내 무의식적인 발걸음이 무겁게 굴러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자전거를 버리듯 끌며, 홀린 듯 그 혼란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경북도청과 중앙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평소의 웅성거림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굉음이 고막을 찢었다.
‘와아아-!’
수천 명 학생들의 차가운 함성과 함께 백차를 탄 경찰들이 거칠게 도로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곤봉을 휘두르고 구둣발로 짓밟는 살벌한 현장, 비명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교복 셔츠가 바닥으로 꺾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재한!”
나도 모르게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경찰이면 국민을 지켜야지, 학생들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재한이는 경찰의 진압 봉에 맞았는지, 이마에서 붉은 피를 울컥 쏟아내며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로 쓰러졌다. 녀석이 쥐고 있던 엉성한 종이 피켓은 이미 시커먼 경찰 군화 발자국들에 짓밟혀 찢어져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녀석의 눈가를 적시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은 제복을 입고 곤봉을 든 경찰들이 군화 소리를 쿵쿵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쓰러진 재한이의 마른 어깨를 붙잡아 일으키려는데, 손끝이 덜덜 떨렸다. 신문 기사 속에서나 보던 잔인한 현실이, 지금 내 손바닥을 붉고 뜨겁게 적시고 있었다.
“재한아, 이게 뭐야! 너답지 않게 이런 일이나 하고!”
나는 녀석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외치며 피가 흐르는 이마를 손수건으로 짓눌렀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재한이의 체온은 지나치게 뜨거웠고, 또 덧없이 붉었다. 언제나 집 마당에서 실없는 장난을 치고 자전거를 훔쳐 타듯 끌며 낄낄대던 녀석의 일상이, 최루와 비명이 자욱한 중앙로의 아스팔트 위에서 형편없이 짓겨지고 있었다. 내 목소리는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으로 사정없이 떨렸다.
“새끼, 와서는…… 이런 말이나 하고.”
재한이가 핏방울이 섞인 침을 뱉어내며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와중에도 녀석의 눈빛만큼은 연기 너머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녀석은 피로 얼룩진 손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깃대를 더듬어 쥐었다.
“자…… 나는 연행될 거 같아. 네가 나 대신 이 깃발을 들고 도청으로 가줘……”
재한이는 피와 흙먼지가 얼룩덜룩하게 묻은, ‘횃불을 밝혀라! 학원에 자유를!’이라 적힌 거친 현수막 깃대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녀석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신념의 상징이었다. 얇은 천 조각에 불과한 깃발이었지만, 내 손바닥에 닿는 순간의 무게는 마치 무거운 철퇴처럼 묵직했다.
“야, 이재한! 이게 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내가 깃대를 꽉 쥔 채 비명을 지르듯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들이 들이닥쳐 재한이의 팔을 꺾어 트럭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학생을 붙잡아라!” 하는 고함 소리 속으로 재한이의 교복 셔츠가 순식간에 휩쓸려 들어갔다.
멀어지는 녀석의 실루엣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내 손에 쥐어진 부러진 깃대의 서늘하고 거친 질감이 나를 바닥에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차가운 2월의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의 진동이 손목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후……”
나는 호흡을 깊게 가다듬었다. 목구멍을 찢는 듯한 차가운 겨울 바람이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지만, 도망치고 싶다는 공포보다 더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 한구석을 찔렀다.
주머니 속 손수건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그토록 매달렸던 안락하고 좁다란 집 안 일상의 신호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털어버리는 대신, 손바닥에 묻은 재한이의 핏자국을 꽉 움켜쥐며 부러진 깃대를 고쳐 들었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거친 천 조각이 바람을 맞아 펄럭 소리를 냈다.
눈앞의 도로 너머로 거대한 경찰 무리와 곤봉을 든 검은 실루엣들이 압박해 오고 있었다. 쿵, 쿵, 군화 소리가 아스팔트를 울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신기하게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깃발을 떨어뜨리는 순간, 재한이가 말했던 우리의 사소한 일상도, 따뜻했던 집 안의 아침 식사도, 내일의 교문도 정말로 불의한 권력 앞에 흔적 없이 지워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나는 펄럭이는 깃발을 가슴팍 앞으로 단단히 받쳐 들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경찰들의 장벽을 향해 똑바로 발을 내디뎠다. 독재의 어둠에 갇힌 도시에, 비로소 나의 첫 목소리를 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