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삶을 바꿔준 2·28민주운동
율원중학교 2학년 강서현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의 첫 횃불을 들고 나섰던 2·28민주운동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주었나요?

나는 1960년 대구 경북고등학교의 한 학도였습니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의 정권 쟁탈 싸움이 극에 달해 있었고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 십 수년째 계속된 독재와 무능에 분노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한국은 참담했고 그런 세상으로부터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던 그때, 1960년 2월 25일에 대구의 중학생, 고등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우리 학교인 경북고와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여고, 대구상고 등에 말입니다. 명분은 실기 시험, 임시 수업, 영화 관람, 토끼 사냥 등 이였습니다. 일요일에 그런 것들을 하려고 등교를 한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반 동료들은 수근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떠올려낸 것은 그날, 그러니까 2월 28일은 민주당의 연설날이였습니다. 민주당 유세에 참가하려는 학우들의 발을 묶으려는 의도였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일요 등교 방침을 내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내가 학우들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자. 학우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아우성을 지르며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일요 등교 강행은 정부에서 학교를 정치도구화하고 있는 것이며 부당한 것이 확연했습니다. 이후 2월 27일 오후에 전교 학생회 부회장인 이대우 학우의 집에 여러 학우들이 모여 부당한 일요등교에 항의하기 위하여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서 저는 우리나라가 부당하지 않고 정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내심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등교한 1960년 2월 28일 낮 12시쯤 “운동장에 모여라!” 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운동장으로 나가자 이대우 학우가 조회단에 올라서 결의문을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의 낭독은 우리들의 가슴 속의 작은 불씨를 점화시켰습니다. 단지 이 세상에 불만은 있었으나 바꾸려는 의지가 없었던 나와는 다르게 자신, 그리고 모두의 불만과 억압을 해소하기 위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행동하는 학우들의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나도 학우들과 함께 이 세상을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아니 해야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정의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저의 목숨이라도 바칠 마음이였습니다. 낭독이 끝난 오후 1시 5분 “나가자, 반월당으로!” 하는 신호와 함께 분노와 흥분에 휩싸인 800명의 경북고 시위대열은 선생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교문을 박차며 세상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봉쇄되어 있던 분노와 정의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일요 등교를 강행함으로써 완전히 깨어나버린 것 입니다.
데모대는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와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계속 달려나갔습니다. “가자! 도청으로!” 반월당을 거친 뒤 경북도청으로 향했습니다. 교문을 돌파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고도 어느새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경북고와 대구고를 제외한 다른 고등학교들도 시위를 벌였습니다. 대구시내는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정의, 자유를 요구하는 학우들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우리는 구호를 계속해서 외치고 땀과 눈물에 젖어가며 더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모든 대구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박수치며 동조해주었습니다. 드디어 도청 중앙 정원에 도착하자 결의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곧 경찰 병력이 투입되어 방망이로 우리를 구타했습니다. 방망이는 끊임없이 학우들을 내려쳐서 피가 흐르기도 했습니다. 나 역시 경찰들에게 구타당해서 손과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피가 나는데도 이상하게도 많이 아프지 않아서 ‘더 시위를 해야한다.’, ‘나라도 덜 읽은 결의문을 더 읽겠다.’, ‘내가 이 나라를 정의로운 국가로 만들겠다!’ 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였던 모양인지 몸에 힘이 쭉 빠져 경찰에게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많은 시위에 참여한 학우들은 구타당한 채로 경찰의 지프차에 실려져서 최조실로 끌려갔습니다. 불안과 공포감에 휩싸였지만 아직 남아있는 학우들에게, 아직 충분한 저의 용기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부당함에 맞서는 것은 어쩌면 많이 힘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학도들은 두려움을 뒤로하고 부당함에 맞서 싸웠습니다. 여러분에게 부당함이 찾아온다면 우리들을 떠올리며, 그날 학도들의 용기를 잊지 말고 민주 정신을 이어나가주세요. 부디 우리의 1960년 2월 28일의 용기있는 행동이 여러분이 살아가는 한국을 부당하지 않은 나라, 정의롭고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