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2·28민주정령이 2024년에게...
대구새론초등학교 5학년 송하륜
“내가 죽은 후 이튿날 비가 거세게 쏟아졌지만 나는 더 이상 비에 젖지 않았다. 이제 우산은 살아서 다음 날을 기대하며 맞을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나는 또 하늘을 날아올라 내가 그토록 조종하고 싶었던 F22 전투기와 함께 팔공산의 구름을 뚫고 끝도 없이 솟아 올랐다. 수많은 장면과 마주쳤지만 어느 순간 조종간은 멈춰 버렸고 정신을 잃어 추락하고 말았다.” 꿈이었다.

7월의 여름은 더 깊어졌고 장마는 지루하고 가끔 나타나는 태양은 너무 뜨거워 피부는 타버릴 것 같다. 요즘 등장하는 꿈 속에서 나는 자주 죽거나, 기절하고, 떨어지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만나서 놀고는 인사없이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K2 비행장에서 블랙이글스 비행팀의 멋진 모습을 본 후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불편 때문에 우리 동네 비행장은 군위. 의성의 다른 한적한 곳으로 옮겨 간다고 한다. 다수의 의견으로 한국전쟁 시기 만들어진 군대 비행장은 이제 도심 중간에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이며 주권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국민주권시대의 대한민국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사회만 제대로 알고 있더라도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여러 가지를 결정할 때 큰 소리 없이 합의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나의 스승님들은 가르쳐 주셨다.

나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아침식사를 하고, 잠들기 전에는 종이 신문으로 한 번 더 세상을 살피는 소년 선비다. 이제 아침 뉴스를 수업시간에 확인하게 되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중요한 일들에 관해 그 맥락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2·28민주운동의 냉돌방 결의부터 이빛나는 항쟁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끝장내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친구들은 2·28민주운동을 모른다. 온라인게임이나 유튜브영상을 말하고 인스타계정의 조회수를 뽐내지만 불의에 항거한 대구의 자랑스런 역사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참다운 가치와 왜 부조리를 무너뜨려가야 하는가를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1960년 2월의 대구시내 고등학교 선생님들중 얼마나 많은 분들이 학생들 편에 섰는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만약 다수의 선생님들이 함께 앞장섰더라면 학생들은 훨씬 덜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교과서에도 불의에 침묵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스승님들이 앞장서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말로는 정의를 외치지만 자신이 받을 불이익과 두려움 때문에 또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조리에 눈을 감는 경우를 역사책에서, 현재의 사건들에서 나는 많은 경우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런 역사 의식 없이 살아간다면 종국에는 짐승들의 약육강식이나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는 야만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부모님은 늘 나를 깨우쳐 주신다. 그리고 오늘 아침 뉴스에는 돌아가신 채수근 해병의 영혼이 분노할 일들로 가득찬 발표가 있었다. 모든 것이 수사단장이 벌인 욕심과 자작극이며 항명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거짓말을 일삼았던 사람들이 훗날 어떻게 되었는가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회적 모순이 계속 켜켜이 쌓여가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나비효과 처럼 태풍이 되어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다고 역사는 경고해 왔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을 유지한 채, 6.25전쟁에서 38선 남쪽의 공산화를 막은 것으로 역사적 소임을 마무리 했어야 4.19혁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의 토대를 구축한 것을 끝으로 퇴장했어야 10.26을 맞지 않았을 것이며,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이지 않았어야 했다.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광과 치욕을 한시도 잊지 않았더라면 역사상 전직 대통령으로서 그토록 오랜 감옥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2022년 10월 29일 오후 서울 용산의 백범 기념관을 방문하고 3의사 묘역을 참배했었다.
용산과 종로는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저녁식사를 위해 남영역을 지날 때 엄청난 시위 군중과 진압 경찰들을 마주쳤다. 그래서 목적지인 이태원을 포기하고 한강대교를 건너갔을 뿐인데 그 날 밤 이태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압사로 사망했다. 나의 평범한 일상은 하마터면 역사적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 날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나처럼 아주 평범하게 일상을 진행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태원 참사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장의 사진이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2016년 겨울, 초등학생이던 형과 아직 어린 나는 대한문을 배경으로 ‘박근혜탄핵!박근혜퇴진!’의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서 있다. 그 주위를 구름 같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그 때 부모님은 형과 나에게 프랑스혁명과 바스티유 감옥을 얘기했었다고 형은 회상했다. 그 날들을 경험하고 형은 조선왕조실록을 시작으로 엄청난 양의 역사책을 읽어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말한다. “하륜이가 운이 좋다면 또 한 번 대한문과 광화문 광장을 배경으로 탄핵과 퇴진을 외칠 기회가 올 것이다.”

정의로운 2·28정령들은 오늘의 우리들 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나는 그 정답을 알고 있다. 인생은 찰나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후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