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할머니와 소녀
광주월계중학교 3학년 김서윤
나는 아직도 그 날의 꿈을 꿉니다. 검은 교복들 사이에 끼어 목청 높여 소리치던 민주주의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직후 경찰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같은 반 친구가, 저번 소개팅에서 마주쳤던 남학생이 쓰러지던 그 광경을 나는 기억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60년 전. 나는 이제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되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10대에 머물러 영원히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나에게도 아름다운 10대가 있었음을 나는 매년 이 때가 되면 느끼곤 합니다.

2월. 1년 중 가장 짧고 가장 추운 달. 내게 있어 2월은 그러합니다. 학생들의 뜨거운 피가 식어가던 봄날을 하루 앞 둔 차디찬 겨울날. 2월 28일. 나는 그 날에 머물러있습니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 같은 할머니도 아니었고 2, 30대의 나처럼 취업난에 시달리는 반동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맑고 순수한 학생이었습니다.
내겐 그런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맑고 순수한, 너무나 보고싶은 친구 영숙이, 말괄량이처럼 늘 해맑았던 미숙이... 전부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저와 가장 친했던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맑고 순수한 학생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아마 시대의 죄일 것입니다. 그 시절, 그 때의 독재정치.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사라지던 시절.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어른들이 정말이지 이상했습니다. 마치 외계인들 사이에 홀로 떨어진 지구인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와서는 상상할 뿐이지만 내 친구들 또한 그랬나 봅니다. 2월 25일 동네 마당발이던 어머니를 둔 영선이가 말했습니다. “야 우리 일요일에 등교한다카데?”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설마 그카겄나? 아니겄제.”, “학교를 일요일에 나올 일이 뭐가 있노?”. 의견은 분분했고 대다수가 부정적이었습니다. 나 또한 아니길 바랬습니다. 금쪽같은 주말을 학교에서 보내긴 싫었습니다.

그러나 반에 들어오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학교에 나와야칸다.”. 이 말에 분개하지 않은 학생이 없었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워낙 소심했던 성격 탓에 속으로 불만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 때부터 였을 겁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라는 감각이 피부에 직접 와닿고, 이내 ‘바로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번에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2월 28일, 한 학년 위로 연년생 오빠가 있던 미선이가 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데모 하자.”

“수상 천변에서 데모한다카던데, 우리도 가자. 경고생들도 간다카데. 우리 형네도 어제 얘기 다 끝냈데. 우리가 빠져서 쓰겄나?”

빠지면 안되지. 역사적인 날이 될 이 날에. 미선이의 말에 우리는 일제히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박차고 뛰어나갔습니다. 아직도 그 때 우리를 말리려 안간힘을 쓰던 선생님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그 날 담장을 넘어 새 시대를 꿈꿨습니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조회단에 선 어떤 남학생이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나는 나도 모르게 구호를 따라하며 공원을 걸었습니다. 반에서 함께 빈약한 도시락을 나눠먹던 친구가 몽둥이에 맞아 끌려갈 지언정 나는 그 구호를 계속해 외쳤습니다. 몽둥이에 사정없이 맞았지만, 지금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때 정의를 외친거니까요.

무서웠죠. 네. 엄청나게 무서웠어요. 그렇지만 멈춰선 안된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결국 두 시간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나는 경찰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을 때보다 그 때가 더욱 두렵고 처절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이제 내겐 10대도, 20대도, 30대도 전부 남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나날이 더욱 긴 삶을 살고있죠. 그런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10대 소녀의 내가 남아있습니다. 오래도록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독재 정치가 물러가길 바라는 내가 아직도 잠들지 못한 채 하염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이제는 내가 그 아이를 재워줄 때가 온 것같습니다. 딸아이를 키울 때처럼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앳된 학생의 얼굴을 한 내게 ‘너의 꿈이 이루어졌다’며 맘 편히 잠들란 말을 해줄 때가 온 겁니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지나 여름이 찾아온 지금, 곧 가을이 오고 겨울이 찾아올테니 나는 내게 풀잎으로 만든 이불을 덮어주며 바람같은 자장가를 불러주러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