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수업 없는 날
다사고등학교 1학년 김이석
•1
새벽 같은 시간에 경사진 내리막길로 날 듯이 달리는 자는 학교에 가고 있는 대구농고 1학년 김명호 밖에는 없을 것이외다. 순진해 빠진 그의 등굣길에는 최근 어느샌가 시끌벅적한 속삭임들이 어렴풋이 다가오고 있었다. xx당 기호 x번 이OO. 그는 걸린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해지고 자질구레해진 두 기둥 사이의 현수막을 바라보며 여기 쓰인 나이가 든 듯 들지 않은 듯한 한 할아버지(혹은 아재)의 크게 부풀어 있는 인적 사항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의 두 발은 그새를 못 참고 학교를 향해 가자고 힘차게 재촉했으니 그는 여태 저기 쓰인 글자들을 기억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속삭이듯이 지껄이는 목소리만 있었다면 그의 등굣길은 아마도 결코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커다란 확성기를 뚜껑에 달아놓고 뭣이 그리 급한지 온 동네를 누굴 칠 듯이 질주하고 다니는 자동차, 황혼이 지는 붉은 저녁 밑에서 고함을 필사적으로 지르고 다니는 요상한 사람들까지 마을 전체가 분주히 투닥투닥하는 전운을 안으로 들이는 것이 그의 눈은 적나라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네의 마을 어르신들은 한술 더 떠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정장을 입은 멋진 구석밖에 보이지 않는 사내들을 흠씬 두들겨 패거나 흔쾌히 마을 경로당으로 초대해 주었다. 그런 풍경은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이글이글 피어오르는 기질이 다분한 분위기였다. 학교에 온종일 같이 지내고 있는 학우들은 또 어떠한가.
최근에 저녁을 먹을 때쯤 오는 석간신문이 있는 학교의 매점은 질서를 찾아보기 아주 힘겨워졌다. 명호는 왜인지 오늘따라 친구들이 찾아보는 석간신문에 호기심이 번쩍 들게 되었다.
소란스러운 것이 그의 마음을 살랑살랑 간지럽혔는지 신문을 탐스럽게 쥐고는 책상에 탁 펼쳐놓았다. 그곳엔 눈에 자주 들어온 할아버지와 안경을 쓴 다른 한 사람이 보였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는 이 어색한 동네의 기운에 미치는 영향이 필연적으로 있으리라. 하지만 그의 시선으로는 느낌만 남아있는 현재의, 어쩌면 오랫동안 지속되어왔을 붕 뜬 모습으로는 지금까지는 거슬리는 눈엣가시 같은 환경까진 도달하지 못했으니 명호는 혼자만의 성숙한 평화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저 학급 안의 자유로운 정령처럼 숨 쉬고 돌아다닌다. 옅은 짐작으로 다쳐 보이는 친구들의 부축도 거리낌 없이 행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억제할 수 없는 혈기 왕성한 기운을 무릇 뽐내며 과격한 어투를 서슴없이 내지르고 다니는, 그의 눈에는 그저 또래 친구 중 거치디 거친 잘 여문 밤송이 같은 사나이들이 명호의 뒤숭숭한 그런 이면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것 혹은 그것들은 순진한 어린 마음을 난투가 일어나는 전장으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넌 어느 편인가?]
당장에 누가 어디서 왜 어떻게 듣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질문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시간만 보내고 있어도 심신이 불안해지는 하루는 꼭 달이 번갈아 가면서 뜰수록 채워지는 것처럼 그 상태가 가장 강한 날이 올 것이다. 비장한 태도로 준비하는 것이 서투른 명호는 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는 듯했다.
•2
애석하게도 좀 지나도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이제 명호의 속과 그 마음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생들에게 일요일에 등교를 실시하라는 방침이 내려지자 학교가 곧 전면 가동되고 있는 범접 불가한 용광로같이 되었다. 약간의 와 그 내면이 유발하는 짜증이 폭발한 학생들은 교무실로 달려가기 일쑤였고, 나름의 사투 끝에 귀환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결과를 보여주는 듯한 표정이 드러나있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은 듯 했다. 다들 반드시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듯 했다. 그들은 겉보기에도 약간의 멋있음이나 철없이 인기를 얻기 위해 하는 위선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사정을 알 만도 하여 속마음을 캐내어보려고 시도할 때면 [됐다.. 닌 이런 거에 별로 관심도 없다 아이가.]
숨길 것도 없어 보이는 상처 같은 것들을 숨기려 들려니 그만 호기심이 퍽 식어가기를 반복한지가 여러번이다. 결국 그는 이번에도 친구들로부터 냉대하게 뒤돌아서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상황의 지속에 덜컥 겁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 전체를 뒤흔들만한 일이고 뭐고 그런 화제는 이제 명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맞이한 토요일은 유난히 밖이 요란스러웠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보이는 가정집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등교를 말리고 있었다. 명호의 부모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들이를 다녀오다가 본 것은 부모님이 하는 제안을 거절하는 몇몇 아이들이었다.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확실히 학생으로는 보이는 사람들이 그러고선 한데 모여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었다. 찰나의 계획이 한순간에 무산된 우리 학교와는 조금 달랐다. 그걸 본 명호는 왠지 모르게 학교를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교를 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해보고 싶었다. 바로 내일, 어디서 뭐가 그렇게 될지는 몰라도 무언가가 터질 것 같았다. 사실 그의 학교만 그렇게 끙끙 앓아눕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동네가 한창 떠들썩했을 때 더 힘차게 나선 것은 주변의 다른 학교들이었다. 문득 그것이 머릿속에 떠오른 그는 근처의 다른 학교 친구인 승운을 찾아다니러 밖으로 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승운은 집 근처 구멍가게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를 만난 명호는 반가움과 가쁜 숨을 겨우 진정시킨 후 자초지종을 설명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승운은 무언가 아는 듯 싶었으나 아주 바쁜 사람처럼 보였다. 대화를 피하진 않았지만 명호의 궁금함이 한계치에 달한 강렬한 질문을 단 몇 문장만으로, 아니 정확히 두 문장으로 뿌리치듯이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그마저도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다.
[닌 암것도 모르는 기가...? 나도 바빠가 얘기는 얼마 못하겠구, 요약을 해가 말해주며는, 닌 이 지역으로 온 지가 몇 달 안 되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3월에 선거가 있는 것은 알고 있을 터제? 고거하고 관련이 있다. 지금 정부가 독재를 위해 우리가 그거에 민감한 걸 의식하고 있어가, 내일 있는 야당 부통령 선거 연설에 참여를 못하도록 등교를 시키는 기라.]
그러고는 명호에게 양해의 답변을 겨우 구한 그였다. 명호는 이에 대해 뭐라 말하기 힘들었다.
무슨 연유로 바쁜지는 관여할 바가 못 되지만 명호는 그가 말해준 혼란속 에 가담되어 있는지는 물어보고 싶었다. 어찌저찌 그를 보내주고 이제 스스로 생각해야 할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제 그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세상의 견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항을 실현하고 있었다.
•3
친구들에게 승운의 해답을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라는 명호의 기대는 금방 사그라 들었다.
토요일과 다르게 등교를 한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른 학년은 다를까 싶어 3층에 올라가 봐도 복도에 보이는 학생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학교에서 시키는 것도 별로 없어 명호는 잠깐 잠에 들고 말았다. 그 후로 명호는 점심시간이 30분 쯤 남았을 때 등교를 한 한 친구의 깨움에 겨우 잠에서 깨었다. 잠 덕분에 진정되었음에도 여전히 아리송한 심정으로 1층으로 내려오자 교장 선생님과 학생회 위원들이 복도에서 강경한 회담을 벌이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그들의 대화를 자세하게 지켜보니 교장 선생님의 표정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에서 점점 너털웃음이 만개한 표정으로 변해가고 학생회 선배들의 표정은 짜증이 섞인 표정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종국에 다다라서는 협상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 듯 했다. 나무의자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숨 죽이며 지켜보던 명호에게 선배 한 명이 다가와 앉았다. 이름은 모르나 안면은 꽤 자주 보이던 선배였다. 명호는 그제서야 그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해소해줄 진정한 사나이임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했다.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탓에 인사도 없이 무례하게 묻는 바람에 무시당하거나 째려보면 어쩌나 싶었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선배의 성격은 명호와 꽤 잘 맞아떨어졌다. 슬슬 본론을 얘기하고 싶었던 명호는 아까 학생회 위원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교장선생님과 나누던 이야기의 내용이 궁금함을 표현했다. 안색이 진지해진선배는 고개를 위로 쳐들며 깔끔하게 다듬어진 표준어 말투로 말했다.
[오늘.. 큰 일을 하나 계획했는데 말이지, 교장 선생님이 크게 말리시는 바람에 다들 돌아갈 수 밖에 없었어. 이대로면 너희가 크게 다친다고 말이시지.]
명호는 그때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일요일은 수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등교를 감행시킨 것이 선배가 말한 ‘큰 일’ 과 상관이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진실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든 그는 선배에게 거의 추궁하듯이 물었다.
[그 ‘큰 일’이란게 뭣인디요?] 거의 흥분한 어조였다.
[시위를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애들도 별로 안 나왔을뿐더러 아까 봤던 것처럼 교장 선생님이 극구 말리셨지.]
마침내 한 마디 남았다. 더 이상 목구멍에서 안 나오는 말도 아니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약간 소심함이 곁들어진 말이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그때 서야 명호는 원하고 바라던 이야기를 시원스레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조금은 충격적이고 조금은 용감했으며, 한 편으론 불타는 열정과 그로 인해 그을린 무모함이 잘 물든 또래들의 투쟁이었다. 바로 오늘 야당 부통령 후보의 선거 연설 날이었지만, 자유당 정권이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학생들을 등교시킨 것이었다. 이 주변 학교의 학생들은 그 점을 날카롭게 알아채고 거리로 나서기를 바란 것이었다. 주변 학생들과 친구들이 시위에 참여할 것이란 소식과 모든 정황을 파악한 이상 명호는 가만히 숨어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가 일어나는 시간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므로 시위에 처음부터 참여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그동안 그들이 겪어왔던 고충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 수 큰 우레같은 소리에 놀라 그 근원을 찾아 다급히 거리로 나아갔을 때는 경찰의 극악무도한 폭력에 가까스로 알아본 친구들은 이미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온몸에 심하든 아니든 옅은 상처 하나쯤을 가지고.
일단 그답게 누구든지 도와주자는 신념을 품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부축해나갔다. 다친 사람들을 옮겨주는 과정에서 명호는 꼭 자기 몸에 상처가 새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자 과격한 전장의 혼란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하늘이 유독 잔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눈앞에 벌어진 엄연한 비극의 양상을 굳이 빤히 쳐다보기보단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알록달록한 도화지 같은 하늘을 보는 게 더 나았다. 노을을 등지며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 오늘도 말을 섞어본 이는 친구들이 아니었다. 다친 이들은 죄다 안면도 별로 없었다. 문득 명호는 몸도 멀쩡했음에도 세상 물정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워 눈물이 남을 느꼈다. 한 마디 중얼거림도 없이 겉은 평온하게 속마음은 타들어 가면서 집으로 향했다. 사지가 꽤나 멀쩡한 채로 돌아온 것도 행운이라는 저녁 식사 속 부모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언가 실현코자 하는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며칠 밤을 그렇게 눈을 자연스럽게 감지 못하다가 3월이 다가왔을 때 발행 된 신문 속에서 사상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긴장이 풀어지는 듯 했다.
이제 명호는 한바탕 전진하고 싶었다. 새로이 알게 된 부당한 권력의 손아귀 속에서 다같이 나오고 싶었다. 번뜩이는 눈이 드러내는 용맹한 기질을 세상과 주변을 위해 마음껏 이용하고 싶었다.
그러는 와중 3월 중순이 되어 테러가 일어나고 부정선거는 기어코 이루어졌다. 그에 맞서 시위가 일어났고 3월 후반에 모든 준비를 마친 명호는 마음가짐을 똑바로 먹고 비장한 눈빛을 하며 나아갔다. 증기 없는 열이 그의 내면에서 한껏 끓어오르고 있었다. 부패한 몸뚱아리로 자유란 이름의 무게를 우습게 여기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주장이 전국적으로 퍼져가는 시점이었다.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 후로는 답답하거나 찜찜하지 않았다. 4월은 다가왔고 날씨는 선선해졌으며 사람들은 고무되었다. 명호는 이제 그런 사람들의 일부가 되어 전국이 하나의 존재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세상을 바꾸는 함성의 처음이 되기를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