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벌써 64년
왕선중학교 2학년 윤지현
안녕, 석아.
난 너의 영원한 동무 명찬이다. 오늘 날씨가 참 좋다. 너의 미소를 보는 것처럼. 넌 거기에서 잘 지내고 있지? 자주 찾아왔어야 했는데 삶에 치여 너에게 자주 찾아오지 못하였다. 미안하다.
요즘 들어 나의 손자의 머리를 보니 우리 국민학교 다닐 때 너의 까까머리가 생각난다. 그때 우리는 하기 싫은 까까머리를 하고 콩나물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곤 했었지. 그리고 우리는 배가 너무 고파 꿀꿀이죽과 탈지 분유를 조금 받아먹겠다고 그 긴 줄도 섰지만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잖아.
우린 그것들을 받아먹고 배탈이 났으니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련한 추억이었다.
너와의 추억을 생각하면 항상 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어. 1960년, 2월 28일에 우리는 수성천변에 있는 장면의 유세를 보러 가려고 했었지. 그런데 우리 때의 대통령이 자신의 독재정치를 유지하려 학생들이 민주당의 유세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영화 관람과 임시 수업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참여치 못 하게 애를 썼었잖아. 그 말을 듣고 우리 학교도 다른 학교처럼 긴급회의를 열어 일요 등교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이 같은 지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 그래서 우리의 동무들, 너와 나는 장면의 유세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인 1960년 2월 28일 우리 학교와 대구 고교 학생들이 나라의 부당한 지시에 반발하려 시위를 벌였지. 난 너와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만, 나라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심보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더 컸다. 허나, 넌 나와 다르게 너의 눈에는 두려움보다 나라의 개혁에 대한 의지가 더 커 보였다. 난 그때의 네가 너무 존경스러웠지. 난 이 시위가 끝나고 너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
“넌 정말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크구나. 우리가 같은 나이이고, 같은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다 보니 우리의 피 같은 노력이 대구 언론에 보도되어 전국적으로 민주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지. 그 당시 나는 우리의 노력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생각과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리라는 희망에 정말 기뻤었지. 하지만 그도 잠시, 우리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듯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하였지. 그땐 속이 끓어올랐고, 시민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항의에 나섰다네. 이것이 3.15 마산의거였지. 3.15 마산의거에 참여한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희생되었다네. 그리곤 4월 11일에 마산 중앙 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의 모습을 본 마산의 시민들이 분노하였지. 결국 이것이 4.19혁명의 밑거름이 되어 우리의 민주주의가 점차 실현되게 되었지. 생각해 보니 우리가 한 일이 최초의 민주주의 시위였고, 우리의 생활과 후손들의 생활이 보다 나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일이었던 것 같다. 난 너와 함께 2·28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을 참 잘하였다 생각한다네.
난 지금 네가 너무 보고 싶다. 그래서 널 생각하며 글 하나 지었다네.
곧 만나세. 나의 동무.
대한민국의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을
그날의 함성들.
그 어떤 시련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외침.
그날의 용기있는 요구는
민주주의로 돌아왔다.
부메랑이 되어.
- 너의 영원한 벗, 명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