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선(심사위원장상)
1960년 2월 28일, 학생들의 작은 용기
왕선중학교 3학년 김태윤
이 당시에는 왕이 국민을 다스린 역사가 길었었고, 일제의 규탄과 탄압에서 벗어난지 오래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초반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었지만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점점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승만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대신 투표하는 ‘간접 선거제’를 국민들이 직접 투표하는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어 나가는 등 헌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자유당의 장기 집권을 위한 부정 음모가 진행되면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계획되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엔 자유당 정권의 악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여론이 전국을 메아리쳤고 불행하게도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박사가 서거하는 바람에 부통령 후보인 장박사가 모든 여망을 걸머졌다.
자유당 정부는 대구 지역 학생들이 유세장에 몰려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방지하고자 대구시내 공립 고등학교의 일요 등교를 진행시켰다. 하지만 이 같은 자유당 정권의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간계를 눈치 챈 경북고 학생들은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호응한 대구의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도 27일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1960년 2월 27일, 뜻이 같은 학교 대표들이 모여 부당한 일요등교에 대해 항의를 하기 위해서 시위대를 조직했고,후술되어 있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그리고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와 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를 일으켰다.
이후 학생들이 반월당, 중앙로를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여 시위대는 점점 불어갔다. 경찰은 당시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 처벌을 완화해야 했고 주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석방되었다. 이후 언론에서도 이 사건이 보도 되면서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60년 2월 28일, 학생들의 작은 용기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첫 발검을이 되었다. 2월 28일 대구학생민주운동의 용기는 불씨가 점점 커져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3.15 마산선거, 4.19혁명, 4.26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다. 마침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최초의 민권 민주주의 혁명인 4월 혁명을 완수했다.
2·28 민주화 운동은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 대구 시민의 시민정신을 보여주었고, 대한민국에 민주적 정통성을 심어 주었던 자랑스러운 대구의 역사이다. 우리는 이런 대구 시민들의 희생을 생각하여 대구 시민이라는 지부심을 가지며 살고, 앞으로 국가에 큰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눈치 보지 않고 먼저 나서서 돕는 훌륭하고 모범이 될 수 있는 대구 시민이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