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선(심사위원장상)
2·28민주운동의 모든 것
왕선중학교 2학년 김수아
2·28민주운동은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의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 일어난 시위입니다. 이 당시의 이승만 자유당은 독재정권의 횡포와 부패, 시정이 절정에 다다르며 빈곤과 불법적 인권유린이 극에 달한 시대 상황에서 일어난 시위입니다. 이 시위는 왜 일어났고 결과가 어떻게 됬는지 한번 알아봅시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이었던 그날 수성천변에선 야당인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학생들이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몰려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우려한 당시 자유당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대구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했습니다. 당시 일부 학교는 갑자기 임시시험을 친다고 했고 일부는 단체 영화관람이나 토끼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등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유당의 꼼수를 학생들이 간파해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의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날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등 학생 8명은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2월 28일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시위를 일으켰고 이를 본 대다수의 시민들은 구타당하던 학생들을 보고 경찰에게 달려들어 뜯어말리고 박수 치는 등 격려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시위엔 8개 학교 총 1,20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 결국 처벌을 완화해야 했고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생은 석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2·28민주운동의 주체는 고등학생들이고 계획적 조직 시위의 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운동이었습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2·28민주운동은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시민들이 민주 개혁을 요구한 ‘최초’이 시위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독재와 부정에 저항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대구 시민정신의 표출이었고, 국가이 민주적 정통성을 심는 선구적 역할을 한 자랑스런 대구의 역사입니다. 100년 전 대구에서 일어나 일제의 경제침탈에 맞서 전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국채보상운동의 반외세 자주화 정신과 함께, 대구.경북 시.도민, 영남인의 자랑스런 시대정신으로 부활, 승화 시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