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선(심사위원장상)
2·28 공원에서
대구명덕초등학교 5학년 조예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얼른일어나! 오늘 공원가기로 했잖니.” 나는 침대에 몸을 더 딱 붙이고 이불을 덮었다. 결국 엄마에게 이불을 뺏기고 나서야 일어났다. 귀찮았지만 씻고 나갈준비를 했다.

도착하니 그래도 상쾌했다. 나는 아빠와 공원을 걸으며 주변을 구경했다.

잠깐 밴치에 앉아서 쉬는데 아빠가 흑백사진을 보고있었다. “아빠 여기 이사람은 누구에요?”
“이분은 너희 할아버지란다.” 나는 젊은 할아버지를 보고 놀랐다. 그러다 아빠가 다시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2·28민주운동에 참여하신 멋진분이란다.” “2·28민주운동이요?” “그래. 우리나라는 1960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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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 수성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계획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요일인 그날의 수성천변유세는 대구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이목이 집중돼 자유당 정권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 정부는 이성을 잃고 고교생인 어린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등교를 지시했고 학교 당국은 온갖 핑계로 일요 등교를 강행했다. 어린 학생들마저 정치도구로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유당 정권의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간계를 간파한 학생들은 불의에 몸을 떨었고 그날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이 같은 자유당 정권의 불법과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로 바꾸어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의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도 27일 시위를 벌였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집에 모인 경북고,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후술되어 있는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이 시위엔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그 중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중엔 학생들을 도와주던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 결국 처벌을 완화해야 했고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생은 석방하였다. 하지만 이후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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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를 보니 2월28일 이었다. 아빠는 그날 있었던 일을 알려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