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작은 움틈에서 큰 울림이 되었다가 다시, 오랜 여운으로 남다
경산옥곡초등학교 6학년 박유빈
나는 옷깃을 여며도 온몸으로 스며드는 찬 바람을 막을 수 없어 잔뜩 웅크린 채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1960년 2월 27일 아침이다. 대구 매일 신문사 기자인 나는 곧 다가올 대통령과 부통령선거로 연일 예민한 정치 상황 속에 굵직한 기사가 없을까 싶어 동분서주하고 있다. 토요일이지만 내일 오후, 수성천변에서 장면 박사의 선거 유세가 예정되어 있고, 쉬쉬하고 있지만 자유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다 경북고에 선생으로 있는 친구에게 들은 정보로는 며칠 전, 비밀리에 교장들의 회의가 있었고, 내일 8개 공립 고등학교에 저마다 다른 명분으로 학생들의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고 했다. 경북고는 영화관람,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 사대부고는 특별활동, 경북여고는 사은회, 대구여고는 졸업생 송별회와 무용발표 연습, 대구농고와 대구상고는 졸업식 예행연습, 대구공고는 노래자랑이 일요일 등교의 이유였다. 나는 정말 잘 포장했지만 속이 보이는 억지스러움에 동원되어야 하는 어린 학생들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수성천변을 둘러보고 날이 어둑해져 동인동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서 연락을 했냐는 말을 다급히 주고받으며, 잰걸음으로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잠시 눈길이 갔다. 볼을 스치는 바람에 추위와 허기를 느끼며 바삐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루일과를 정리하고 잠을 청했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귀청을 때리는 닭 울음소리에 이른 일요일 아침을 맞았다. 마침 태양이 밝게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취재할 내용들을 미리 정리해 보고, 카메라를 닦고, 점검을 마치고 정오쯤 집을 나섰다. 어제 보았던 학생들이 맘에 걸리기도 했고, 친구의 말도 있어 먼저 경북고로 갔다.
조회단 주변에 학생들이 모여있고, 조회단 위에서 두 학생이 무언가를 읽고 있고, 곧이어 수백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와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채로 구호만을 외치며 반월당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는 기자의 직감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렀다.
반월당에서 대구고와 경북여고 학생들과 합류해 중앙파출소를 지나 경북도청까지 나아갔다. 도청입구에서 뒤늦게 진압하려 몰려온 경찰들에게 곤봉으로 맞고 강제 연행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 진압에 나는 분노가 차올라서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 앞을 막아섰지만 어른인 나도 무력 앞에 굴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을 선동했다고 고발당할 수 있다는 협박까지 받았다. 가까스로 카메라를 숨겨 신문사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갔다. 신문사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한 남학생이 내게로 뛰어와서 우리의 외침을 알려 달라며 접힌 종이와 필름 한 통을 건네고는 이내 시위대열에 합류해 구호를 외쳤다.
“학원을 정치 도구화 하지 말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나는 시위대를 뒤로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아 종이를 펼쳤다. 결의문이었다.
《 결 의 문 》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중략...)
우리 백만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고르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그 촛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큰 꿈을 안고 자라나가는 우리가 현 성인사회의 정치 놀음에 일체 관계할 리도 만무하고 학문 습득에 시달려 그런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그러나 이번 일을 정치에 관계없이 주위 사회에 자극 받지 않는 책냄새, 땀냄새 촛불 꺼멓게 앉은 순결한 이성으로써 우리의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밑바탕으로 하여 일장의 궐기를 하려한다.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이 목숨이 다 할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이며, 이러한 행위는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릴 학도요,조국을 괴뢰가 짓밟으려 하면 조국의 수호신으로 가버릴 학도이다. 이 민족애의 조국애의 피가 끓는 학도의 외침을 들어 주려는가?우리는 끝까지 이번 처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싸우련다.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1960년 2월 28일
나는 학생들의 결의문을 읽으며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 일어난 힘들고 가슴 벅찬 일들을 기사로 썼다. 막힘없이 쓴 기사를 읽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깨를 흔들며 깨우시는 엄마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분명히 잠들기 전, 눈물이 말라서 차가운 볼이 더 틀까 봐 문질렀었는데 지금은 놀랍도록 뜨거운 공기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졸린 눈을 깜빡거리며 둘러보니 내 방안 책상에 앉아 잠에서 깬 것이었다. 며칠 전, 내가 속한 봉사단체에서 진행한 역사 탐방 및 플로킹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2·28민주화운동 기념회관에 갔었다. 이른 아침부터 엄마와 언니는 봉사자분들을 위해 간식과 시원한 음료, 단체 조끼며 생분해 쓰레기봉투와 집게 등을 챙기시기에 나는 차로 물건을 옮기는 일을 도와드렸다. 50분 거리에 기념회관에 도착해서 1층 로비에 열여섯 명이 모여 간단한 인원 점검을 하고, 민주주의 발원(민주주의 운동의 발생 배경과 전개 과정)부터 민주주의 잉태(광복, 한국 전쟁, 이승만 집권안내), 타오르는 횃불(이대우 선생의 냉돌방에서 만들어진 결의문), 불꽃 계승(8개 고등학교의 시위 형태, 2·28 민주운동 이후에 4.19혁명에 끼친 영향)부분을 지나 사료관과 영상관, 포토존을 거쳐 로비 건너편에 새롭게 단장된 곳으로 갔다. 미국의 뉴욕타임즈, 영국의 타임즈, 일본의 재펜 타임즈 등에 보도된 2·28 민주운동에 관한 외신 자료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당시 시위대에 참여했던 8개 고등학교 학생분들의 성함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4층 회의실에 모여 작년에 새로 제작된 2·28 민주운동에 관한 영상을 보면서 그 당시에 언니, 오빠들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고, 집에 와서 공모전 생각으로 3일 동안 인터넷으로 2·28 민주운동에 관해 검색하고 또, 했다. 2·28 민주운동에 빠져 며칠을 보내서였을까 꿈에서 나는 1960년 2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기자가 되어있었다. 정말 현실처럼 긴박했고, 간절했고, 가슴이 뛰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몇몇의 10대 청소년들이 만들어 낸 작은 민주화의 씨앗이 움터서 전국으로 확산되어 대통령과 여당의 갖은 횡포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독재로 이어질 뻔한 사태를 대통령의 하야로 막아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확인 시켜준 위대한 큰 울림이 아닐 수 없다. 어렵게 움튼 그날의 작은 씨앗은 4.19 민주혁명이 되었고, 5.18 민주화 운동이 되었고, 다시 6.10민주항쟁이 되었다. 그날을 기억하고, 노력한 분들이 계셔 2018년 2·28 민주운동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고, 2023년 5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업적이 되었다. 2024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자유로운 국민으로 IT강국, K-콘텐츠 강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이땅에 민주화의 씨앗을 싹틔워 준 대구의 고등학생 언니, 오빠분들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나 또한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깨어있는 의식과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지켜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