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민주화의 그림자
청주상당고등학교 2학년 황서영
나는 오늘도 그녀와 함께 발을 맞춰 걷는다. 짧게 자른 단발 머리, 무릎을 덮고도 남는 긴 치마, 살짝은 때가 타 누래진 양말, 밑창이 다 헤진 단화를 신은 그녀의 뒤를. 그녀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끝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런 지 앎에도 침묵을 지킨다. 안방의 문을 밀어 왼쪽 눈으로 들여다보니 아직은 가족들이 잠에 빠져있다. 틈 사이로 색색 거리는 숨소리만이 빠져 나온다. 그녀는 가슴을 몇 번 쓸어 내리곤 그 문을 다시 닫았다. 어떠한 빛도 어떠한 어둠도 이 안을 침범 할 수 없게. 나는 그런 그녀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그녀가 닫은 문 앞에 머리를 기대곤 눈을 감아 멍 때릴 동안에도 나는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해가 다 뜨지 않았다,

아직은 아침이라고 부를 수 없다. 코 끝을 킁킁 거리면 비릿한 물냄새 밖에 나지 않는다.
내가 추위에 몸을 약간씩 떨기 시작하자, 그녀가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것에 맞춰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걸어간다.

우리는 아무말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말소리 대신 모래 밟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우리 주위엔 어떠한 사람들도 존재 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온기 마저 떠났다. 이런 등굣길은 처음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항상 전력을 다해 뛰어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던 곳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갈 수 있었기에. 문 닫은 이발소의 간판을, 연기가 새어 나오지 않는 찐빵집을, 아무도 앉지 않은 마루를 모두 눈에 담아냈다. 그녀와 나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나온 콧물을 공기와 함께 삼켰다. 치마가 미처 가리지 못한 종아리가 시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마치 우리는 행군을 하는 군인이라도 된 듯 박자를 맞춰 걸었다.

오늘따라 그녀는 제멋대로였다. 그렇게 일정하게 걷다가, 느리게 걷다가도, 빠르게 뛰고 그러다가 또 멈추는 것이 아닌가. 그녀에게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아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런지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에. 그저 그녀의 행동을 오늘만은 참아주기로 했다. 오늘 하루 정도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하늘께서 뭐라고 하시진 않을 테니.

학교의 모습이 선명해 질수록 그녀는 자주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길 양 옆으로 낮게 솟은 건물들을 보았다. 다시 돌아 앞을 봐 걸어가도,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이 지나면 전과 같이 뒤를 돌아본다. 가끔은 입을 앙 다문 상태로. 나는 몇 번이나 뒤에 무언가가 있는지 살펴 보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 길 너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거였다. 그녀의 생명력 있게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이 나한테도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 번, 두 번, 열 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 없는 숫자가 돼서야 우리는 제대로 앞을 향해 갈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두 눈을 감곤 앞을 향해 달렸다. 나는 내게 아무말 없이 달리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따라잡기 위해 나 또한 달린다. 별 거 들어있지 않는 가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긴 치마가 펄럭여 그녀의 다리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모래를 밟는 소리가 아닌 모래를 누르는 소리가 터진다. 학교의 모습이 점점 커진다. 길이 점점 짧아진다. 그녀와 나는 아무도 없는 학교의 교문을 한 번에 펄쩍 뛰어 들어갔다. 학교의 모래가 발에 닿았을 때가 돼서야 우리는 멈출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몸을 숙이고 가쁜 숨을 뱉어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젠 새벽이 가고 반짝이는 아침이 왔다. 나의 모습이 확실해진다. 태양의 붉은 빛이 어째서인가 횃불과도 같이 보였다. 횃불의 빛을 받은 그녀의 땀은 동방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땀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유로워 그림자인 나를 버리고 멀리 멀리 날아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