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길
서울광영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예은
드디어, 시간이 다 되었다. 평생 오지 않을 거 같은 날이 찾아왔다.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되니 떨렸다. 방안 가득 아침 햇살에 눈을 감고 한참 있다 학교로 향했다. 수많은 학생 속 가장 친한 친구 녀석도 보였다. 여전히 교복을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 모습을 하고 더 불량한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보였다. 오늘이 지나면 저 자전거를 볼 수 있을까. 사실 며칠 전 일요일에도 등교하라던 선생님의 말씀에 황당했다. 반발감에 이유를 물었지만, 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말투도 어이없는 듯한 말투와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뒤로해야 헸다.
조심해서 다녀오라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단상 위에 올라간 내 친구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밝고 장난도 많이 치던 애가 저리 진지한 모습은 또 처음 봤다. 또 보고 싶을 거 같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인파에 더는 주저할 수 없었다.
친구 녀석은 정갈하게 잠근 단추, 이상하게 쓰던 모자도 단정한 모습에 괜스레 털어보았다. 여동생과 같이 등교한 이 길이 오늘따라 정겨워 보여 나는 더 힘차게 나아갔다. 어디까지 가고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둘씩 없어져 가는 친구들뿐. 나와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왜 가만히 두지 않는지, 아니 어쩌면 가만히 두는 게 더 이상한 건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 내 멋대로 움직임을 따라 몸을 맡겼다. 내민 손을 잡는 게 누군지 이젠 상관이 없다. 다만 내가 아끼는 사람들만 아니면 좋겠다. 익숙한 목소리만 아니면 좋겠다. 내 바람이 씨알도 안 먹혔는지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그 사람만 아니길 바라면 돌아봤지만, 덩치들 사이에 보이는 작은 어깨.
짧은 단발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지금 가면 잡힐 걸 알면서도 그 어깨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멀었다. 손을 뻗어봐도 닿지 않았다. 몸부림쳐도 닿지 않았다. 계집애가 있다고 곤란해하는 숨소리도 날 놔주지 않는 그것들도 역겨운 냄새도.
나도 이제 다른 친구들처럼 끌려가는 거겠지. 가서 어떤 수모를 당할까. 아까 보니 얼굴들이 많이 상했던데, 그 정도는 감수해내야만 하겠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곳에 막상 가려니 살이 떨렸다. 이제 어머니의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여동생의 얼굴을 보니 힘이 쭉 빠졌다. 순순히 끌려가는 탓에 가장 친한 친구 놈도 날 바라봤다. 이미 상한 내 팔, 다리에 친구 놈 눈빛이 아까와는 달라졌다.
지금 포기한다면 다 끝이겠지. 여기까지 온 내 수고도 없어지겠지. 여전히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은 저항했다. 처음 잡혔을 때부터 이렇다 하지 못했다. 잡혀 와서도 저항하는 모습들. 내 앞을 지나가는 친구들. “포기하지 마” 하나의 목소리가 이렇게 큰지 처음 알았다. 순순했던 탓에 쉽게 그로부터 빠져나왔다. 하나하나가 부족한 탓에 꺼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그 난리 통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봤을 때 상한 얼굴과 달리 이룬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이 나도 좋다.
이걸로 인해 무언가 바뀔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려운 걸 알고 있다. 단지 알리고 싶다. 묵인하지 않으며 듣는 척이라도 하길 바랐고 인정해주는 척이라도 해줬으면 했다. 어려운 걸 알지만, 힘든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이 길을 떠날 수 없다.
포기할 수 없다. 우리로 인해 많은 학생이, 사람들이 봐준다면 바뀔 작은 희망만 하나 않고 다시 길 위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