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무모했기에 타올랐던 그 날
부산정관고등학교 1학년 전지원
“대구의 모든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정상 등교를 합니다. 우리 학교는 앞산으로 토끼 사냥을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2월 28일은 모두 정상 등교하세요. ”
“ 2월 28일에 임시 고사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시험을 치러 학교에 오세요. ”
“ 선배들이 졸업식 했으니 28일에 나와서 청소나 하고 게임하고 놀게 학교 나와. ”
“ 28일에 노래자랑 대회가 있습니다. ”
“ 28일에 단체 영화 관람이 예정되어 있으니 모든 학생은 학교로 등교해야 합니다. ”
대구의 모든 고등학교에 2월 28일에 정상 등교를 하란 공문이 내려왔다. 모든 학생은 학교에 와야 한다는 내용. 이에 따라 우리들은 28일에 학교에 와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이전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 후보와 붙었던 민주당의 조병옥 박사가 미국으로 수술받으러 떠났다. 사망했었던 사건. 그리고 우연인지 아닌지 공문이 내려온 28일은 부통령 선거의 후보자인 민주당의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던 날.
“ 2월 27일 학생들은 모두 오전 수업만 하고 자유당 이기붕 의원의 유세장에 갈 겁니다. ”
반면에 27일은 자유당의 연설 날이었으며 이날은 단축수업을 하여 참석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서 이상함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누가 봐도 보이는 28일 대구 지역 학생들이 유세장에 몰려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유당의 그런 얄팍한 속셈이었다.
어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언제까지 눈에 훤히 보이는 술수와 독재에 입 다물고 가만히 놀아나야 하는가.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라도 거리로 나가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27일 오후, 나와 내 친구 8명은 우리 집에 모여 부당한 일요 등교에 대해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했으며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를 포함한 우리의 다짐을 담은 결의문도 작성했다. 지금 우리의 이러한 행동이 무슨 결과를 이끌지는 여기 앉아있는 그 누구도 모른다. 우리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해야하기에 그저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며 완벽하게, 또 완벽하게 준비했다. 결전의 날 아침이 밝았다. 두려움이 피어올라 해가 뜨지 않았으면 했지만 나의 바람이 무색해지게 어김없이 해는 떴다. 지금 문 턱을 밟고 있는 순간마저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뛰고 있다. 등줄기엔 식은땀이 흐르며,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퇴학을 당할 수도, 저 뒤에 나를 보고 웃어주는 가족들을 두 번 다시 못 볼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그만둘까란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그렇지만 이건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아니면, 우리가 아니면 그 누가 하겠는가. 그렇게 난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감춘 채 가족들에게 웃으며 인사한 후 거리로 나왔다.
곁에 있진 않지만 우리는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의 안위와 성공을 빌었다. 그리고 각자의 할 일들을 하러 떠났다. 그 순간의 우리는 누구보다 비장했으며 또 빛났다. 학교에 가자 운동장엔 그 많은 학우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한 가지의 같은 목표를 가지고 모인 친구들이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도망가지 않았다. 그 순간 가슴언저리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오늘 민주화 운동의 불꽃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기적을 만들 것이다. 오늘 우리가 희생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교문을 막고 있는 선생님들은 뚫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벌써 우리를 제지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친구가 있는 학교는 막혀서 나오지도 못했다. 길거리엔 우리를 응원하고 도와주는 시민들과 우리를 막으려는 정부가 뒤섞여 혼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누가 불타는 학생을 막겠는가.
“ 이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이며, 이러한 행위는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나는 그 아수라장 속을 헤집고 들어가 경북도청사 앞의 소나무에 뛰쳐가 결의문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록 앞부분도 채 읽지 못하고 도청사로 끌려갔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씨를 지피기엔 충분했다. 이걸로 내 역할은 끝났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학교에 갇힌 학우들을 향해 얼른 나오라고 소리치는 다른 학교 학우들.
그런 학생들에게 이래봐야 달라질 게 없다며 그만하고 공부나 하라는 선생님들. 북한의 지시라며 모함하는 치안 국장.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하는 학생들. 그리고 끌려가는 나. 도청사에 잡혀있는 나와 150명을 이끌고 교문 밖으로 나간 친구들, 혼자 교무실에 잡혀있던 친구는 이제서야 내 할 일을 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시민들이 민주개혁을 요구한 최초의 시위였으며 이후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첫 횃불을 들었다. 그저 우리는 앞으로도 부디 이 횃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