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2·28 민주운동
경북공업고등학교 2학년 방준빈
오늘은 2·28 민주운동에 대해 소개하려한다. 2·28 민주운동은 4.19 혁명의 출발이었으며, 이승만 독재정권의 무능과 부패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4.19 혁명이 시작이 되고 학생들의 참여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1960년의 한국은 십수 년째 계속된 이승만 독재정권으로 국민들의 삶이 마지막까지 내몰렸다.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 권력을 강화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했다. 이승만을 대적할 유일한 대안으로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한 달 앞둔 2월 15일 급서함으로써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보니 그 당시에 얼마나 부패가 심했는지 독재정권의 무능이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2·28 민주운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당국이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학생들은 일요등교 방침이 알려진 직후부터 각 학교별 긴급회의 등을 열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학교에 일요등교를 철회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경북고 학생부부위원장의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부속고 등의 학생들이 모여 부당한 일요등교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고 상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어른들은 나 몰라라 할 때 학생들이 부당함을 인지하고 이 부당함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28일 오후 1시경 경북
고생 800여명이 대구 중심부인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해서 시위대는 불어났다. 대구는 곧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시위대는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을 지나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불의를 규탄했다. 이날 시위현장에서 약 22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됐고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서슬 퍼런 이승만 독재에 움츠렸던 대구지역 언론은 어린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 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3.15 마산의거에 이어 4.19 혁명이라는 역사의 꽃이 만개하게 된다.
2·28의 역사적 의미는 우리나라 민주운동의 출발점이라는 것에 있다. 또한 두 학교에서 학생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시민운동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2·28은 당시 고등학생들의 냉철한 시대의식에 기반하여 발생한 민주주의 실천 운동이었다. 원래는 2·28 민주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고 지내지는 않았는데 오늘 이 글을 쓰면서 2·28 민주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흘러갔고, 어떻게 끝났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원래는 알지 못했던 세세한 내용까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학생들이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나였다면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당시에 사회가 얼마나 암울하고 부패가 심한지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었고, 어른들이 나 몰라라 하고 넘겼던 부분을 학생들의 의지로 다같이 단합하고 힘을 모아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평화롭고 편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존경한다.
앞으로 2·28이 일어난 날이 오면 항상 희생이 있어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음을 느끼고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나갈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