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2·28, 그날을 기억하며: 다시 싹이 틀 때까지
새론중학교 1학년 성민진
3월 마지막 날, 중학교에 올라온 뒤 처음으로 반장 선거를 했다. 반장 선거도 했겠다, 사회선생님은 우리에게 언제부터 국민이 직접 선거를 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뽑았는지 아느냐고 물으셨다. 놀랍게도, 친구들은 그것을 잘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모두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고, 선거가 없었던 시대는 어땠을까, 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의 지도자는 우리의 손으로 뽑았는데, 자유롭게 투표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역사가 그랬다는 것일 뿐. 우리가 그 상황이 아니기에, 그것이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맞선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떤 상황이었을지 궁금해하는 친구는 없다.
하지만 나는 알려주고 싶다. 그것들이 얼마나 숭고한 희생이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 과정이 얼마나 아팠던 일인지.
나는 대구로 이사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친구들과 한 공원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가는 그곳의 입구에는 2·28 기념 중앙 공원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1960년에 일어난 2·28 학생 민주 의거는 당시 독재 정치를 펼치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에 항거하여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 민주화 운동으로 이는 곧 4.19 혁명으로 이어진, 아주 의미 깊은 의거였다. 나는 역사에서 일어난 일 중에서도 내 또래의 학생들이 부패한 정권에 맞선 것을 굉장히 존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곳으로 가니, 아쉬운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2·28 의거를 기리기 위한 공원이었는데, 내 친구들은 공원이 무엇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많은 아이들이 지나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공원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2·28 학생 민주 의거는, 4.19 민주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독재 정치의 이승만 정권을 물러가게 한, 큰 의미를 가진 의거였다. 과거, 내 또래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 걸고 지켜낸 일이, 현재, 내 또래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공원의 입구에서 김윤식 시인이 지은 시,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을 보게 되었다.
‘설령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먹장 같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다 쳐도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 앓고 있는 하늘 구름장 위에서 우리들의 태양이 작열하고 있기 때문. (중략)
1960년 2월 28일. 우리들 오래 잊지 못할 날로. 너희들 고운 지성이사 썩어가는 겨레의 가슴속에서 한 송이 꽃으로 향기로울 것이니.’
이 대목에, 내 심장에는 죄책감이 눌러 적혀졌다. 그때, 교복 입은 학생들이 어린 나이에 목숨 바쳐서라도 체념하지 않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고, 결국에 우리나라에 민주라는 씨앗을 심어주었는데, 우리는 그들이 피운 꽃의 향기를 신경 써서 맡은 적이 있었나. 시인이 말한 그 한 송이의 꽃을 자세히 보기는 했을까. 어쩌면 그 씨앗은 본래부터 있었다고, 본래부터 피어날 것이었다고, 우리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지 그 꽃을 알아보고 곁을 지켜주는 것? 과연 그럴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다시 씨앗을 심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혁명과 의거를 기억하는, 새로운 씨앗을. 금방 싹을 틔워 자라고 다시 또 다른 아이가 그 씨앗을 심을 수 있도록. 수많은 학생들이 위험을 감
수하고 오직 미래의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제 한 몸을 헌정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2·28 의거 당시 작성된 결의문의 한 부분을 다시 가슴에 새기려고 한다.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중략)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그들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온몸을 미래를 위해 맡겼건만,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알려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했던 일들을.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