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2·28에 대해
경북공업고등학교 2학년 성동욱
2·28의 배경은 이러했다. 1960년의 한국은 참담했다. 십수 년째 계속된 이승만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몰아갔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비민주적 개헌과정을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 권력을 강화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당국이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등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일요일 등교의 명분은 조기 중간고사,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이었다. 학생들은 서로 모여 일요일 등교가 부당하다고 지적하며 시위를 위해 상호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 낭독은 격앙되어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경북고생 800여 명이 대구 중심부인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했으며 교문돌파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고 학생들도 마침내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박수치며 동조했다. 경북고 학생들은 오후 1시 30분경 도청에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연행되면서 3시까지 데모를 했으며, 120여명이 연행되었다. 이날 시위현장에서 약 220여명의 학생들이 경차에 체포됐고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각 학교의 교사들도 모진 책임 추궁을 받았다. 대구지역의 언론들은 어린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28의 함성은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저는 2·28 사건을 조사해보고 글을 써보면서 계속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지금의 대통령이 그때와 같은 독재 정치를 하고 있고 부정선거를 시도하고 학교 측에서는 그저 정부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면 나는 그때 그분들처럼 앞장서 시위를 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의 그분들처럼은 못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항상 누구보다 앞장서는 삶이 아닌 누군가가 하면 그걸 따라하고, 그제야 시작하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내 친구들이 피해를 받는 상황이 온다면 용기 내어 앞으로 나가 저의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한 2·28 사건을 통해 단합과 협력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대구 2·28 학생민주화 운동은 다양한 계
층의 사람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민주화 운동이 학생들만 했고 다른 시민들은 무관심했다면 절대 성공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끝으로 그때 다수의 모든 고등학생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그 용기 있고 멋진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저희가 이 땅에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