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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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중학교 3학년 김명준
1960년 2월 24일 수요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여느 때와 다름없던 화창한 날이었다. 선생 한 명이 교실 앞문을 열며 들어온다.
“자, 조용히 하고 다들 앉아봐라!” 곧 다가올 하교 시간에 들뜬 몇몇 학생들이 일어나 수다를 떨다 뚝 멈추었다. 모두 일제히 자리로 돌아갔다.
“또 뭐가 왔구만.”
정호 옆에 앉아있던 동민이 혀를 차며 툴툴댔다. 정호는 동민의 시선을 따라 선생을 보았다. 선생의 손에는 통신문 여러 장이 들려있었다. 선생이 통신문을 탁탁 쳐서 정리하며 왼쪽의 줄부터 통신문을 나눠주었다. 학생들은 전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뒷자리 사람에게 통신문을 넘겨주고 있었다. 정호가 앞사람에게 넘겨받으며 통신문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아니, 이게 뭐야?”
정호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몇번이고 손에 쥔 통신문의 기사를 읽었다. 통신문을 받은 학생들은 전부 옆자리 짝꿍과 수근거리며 대화하고 있었다. 통신문에는 커다란 글씨체로 분명하게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번 주는 일요일에도 등교를 요함. 일요일인 2월 28일까지 학교에 모든 학생들이 시간에 맞춰 등교할 것. 지키지 않는 학생에겐 학교장이 지시하는 벌과 수감형에 처함…… 잊지 말고 전국의 모든 학생이 일요일에 정상등교 및 수업을 할 것. ……]
‘무슨 이런 날벼락이 있단 말인가.’
정호는 고개를 돌려 바로 옆의 동민을 보았다. 동민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아주 찌푸리고 있었다.
“왠지 오늘 아침부터 불안하더니만, 이런 젠장할!”
동민이 책상을 탁 쳤다. 정호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목숨같은 주말을, 그것도 정부가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빼앗다니, 심지어는 토요일도 아닌 일요일이라니. 누군진 몰라도 정호는 이따위 정책을 추진하고 주도한 사람의 얼굴을 한대 때리고 싶었다. 수근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뚫고 선생이 교탁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자, 조용히들 해봐라. 나도 안다. 너희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라에서 이렇게 하라고 내려온 것 같더구나. 그럼 거기 나와 있듯이 이번주 일요일 하루만 학교에 나와라.”
그렇게 말을 이어가는 선생의 표정에서 난처함이 드러나 있었다. 동민은 이를 꽉 물고 날카로운 눈으로 선생과 통신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히 담임은 이런 일이 벌어진 까닭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못 알아차린 몇몇 학생들도 많았지만, 동민은 사실 이유를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잠깐, 장면의 유세가 언제였다고 했지?’
일요일…… 그래, 그랬다. 이번 주 일요일인 2월 28일이다!
동민은 선생의 말따윈 대충 한 귀로 흘려들었다. 선생은 얼굴에 그림자가 진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정상등교이긴 하지만, 우린 학교에서 시험공부도 하고, 토끼 사냥도 하고 영화도 관람할거다. 주말에 나오는 것이 귀찮은 것 못지 않게 재미있는 활동도 할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이나 주변 다른 사람들 싫게 굴지 말고 일요일에 등교하도록 해라.”
동민과 정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동민이 정호와 수근거리며 말했다.
“어이가 없군! 불법 선거를 위해 유세장에 가지도 못하게 하다니!”
학생들은 이제 모두가 까닭을 깨닫고 매우 분노했다.

종례시간.
학생들은 모두 찡그린 표정으로 교실을 나가며 서로 삼삼오오 모여 한가지 주제로만 대화를 했다. 학생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운동장 가운데에 모여있었다. 동민이 가방을 휘휘 들고 가는 정호를 두들기며 말했다.
“야, 저거 봐라!”
정호는 동민의 손 끝이 향하는 곳에서 학우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다들 집에를 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뭘 하는 것일까. 문득 정신을 차리자 동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야! 같이 가!”
정호가 돌계단으로 뛰어들어 달려가 운동장에 있는 동민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많은 학우들의 어깨 너머를 까치발을 들어서 보았다. 누군가가 사람들의 빈 공간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학생부위원장 이대우잖아? 뭐라고 말하는 거지?’
학우들이 잔뜩 둘러싼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학생부위원장 이대우였다. 이대우는 연설을 하듯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비겁하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는 자유당 정권의 지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장면 박사의 28일 유세장에 못 가게 하기 위한 계략입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하고, 일요일 낮 12시 30분에 이곳의 조회단에서 모입시다. 학생들이란 이유로 이리 부당하고 옳지 못한 등교를 당할 수는 없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는 이대우의 모습에 모두가 그 말에 동의했다.
다들 가방을 팽개치고 손을 높게 들며 소리쳤다. 그리고 굳게 맹세했다.
“일요일에 모입시다! 자유당 의원들의 야망에 넘어가지 맙시다!!”

지나가 오는 목요일과 금요일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게 수업을 하는 듯 했지만, 사실 학생들은 각 반 반장들과 학급별 긴급회의를 열어 어떻게 대처 할 것인지 머리를 굴리며 회의를 했다. 그 부당함을 지적하며 학교에 일요등교를 철회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에 학생부위원장 이대우는 심각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2월 27일 오후, 경북고 이대우의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속고 등의 학생들을 불러냈다.
각 학교의 대표 학생들은 부당한 등교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고 상호 연락망을 구축했다.
그리고 또한, 가장 중요한 결의문을 작성했다.
그렇게 이대우의 집은 학생들로 북적이며 시간을 흘러보냈다.

2월 28일 낮 12시 30분.
마침내 일요일이 되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들며 조회단 위의 이대우를 집중하여 지켜 보았다.
정호와 동민 또한 서둘러 학교에 뛰어 들어가 교문을 통과했다.
교문 너머로 심각한 얼굴을 지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선생 몇 명이 보였다.
정호는 더욱 걸음을 재촉해 운동장의 학생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조회단 위의 학생 대표들과 이대우가 눈에 들어왔다.
이대우는 조회단에서 학생 대표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서로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우가 앞으로 몇 걸음을 가 조회단의 앞 끝부분에 섰다.
그리고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이대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운동장의 모두가 와아아 하고 소리를 외쳤다. 결의문은 효과가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뜨거운 가슴에 뛰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학생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우글대는 학생들의 시위 행진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를 위한,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올랐다.
2월 28일, 대구 학생들은 대구 중심부인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했으며 교문을 지나감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고 학생들도 마침내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대구는 곧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원하는 학생들의 함성소리로 뒤덮였다.
시위대는 인구가 많은 중앙통 매일신문사를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옳음에 그릇된 불의를 소리 높여 규탄했다.
여러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박수를 치며 동조했다. 2·28. 이 시위는 어른, 학생 할 것 없이 대구의 모두가 뜨거운 양심의 정의를 위하여 소리쳐 나가는 날이었다.
곧 바로 시위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경대사대부고와 대구상고 등의 학생들은 교내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거나 학교 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수성천변 유세장으로 간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대구농고, 대구공고 등의 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 날 시위현장에서 약 220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학생들이 경찰에 언행되가며 각 학교의 교사들까지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다. 대구의 학생들이 용기내어 정부 권력에 맞선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양심의 소리를 외쳤다. 결국 이승만 독재에 움츠렸던 대구지역 언론은 ‘대구학생의거’를 전국에 보도하였다.
그리고 이 2. 28 민주화 운동은 3. 15 마산의거와 4. 19 혁명으로 연쇄되어 이어졌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학생들이 먼저 일어나 발 벗고 나선 2. 28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의 빛이 찾아오게 만들었다.

2. 28 민주운동은 2018년 마침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2. 28의 그 영혼과 정신은 지금까지 계승되어 내려오고있다.

– 2. 28 민주화 운동을 기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