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꺼지지 않는 불씨, 우리는 학생이었습니다.
왕선중학교 2학년 이서윤
밤 12시, 평범한 가정집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보인 그림자는 무언가를 공책에 열심히 끄적이고 있었다. 까슬까슬한 짧은 머리, 이불 옆에 널부러진 책가방, 경북고등학교 교복, 그리고 ‘박선우’ 라는 이름이 박힌 명찰. 선우는 마치 화가 난 듯 입술을 잘근거리며 연필을 꽉 지고 공책에 글자를 꾹꾹 눌러적고 있었다.
1960년 2월 26일, 흐림
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우리 학교 뿐만 아니라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여고, 대구상고 총 8곳의 학교에 말이다. 일요일 등교 방침의 명분은 조기 중간고사, 영화 관람, 토끼 사냥 등이었다. 그러나 나와 친구들은 이 명분 아래 숨겨진 검은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전교생이 이대로는 물러날 수 없는 노릇이라며 분노했다. 학생 회장과 부회장을 중심으로 방과 후 강당에서 비밀리에 긴급 회의가 열렸다. 나와 태호, 승재, 기철이 역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우리 학생들은 강당에 모여 일요일 등교 방침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학교에 일요 등교를 철회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 명 한 명씩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을 때, 학생부위원장이었던 대우가 내일 27일에 자신의 자택에 모여 일요 등교 항의를 위한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가 동의했고, 몇몇 애들은 자신이 다른 학교에 아는 애들이 좀 있다며 미리 얘기놓을테니 주변 학교와 다 같이 결합하자고도 했다. 그렇게 오늘 회의가 끝이 났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으는 학우들을 보며 나의 의지가 더욱 불타올랐고, 먼저 나서서 시위를 조직하자는 대우에게 고맙기도 하였다. 연필이 서서히 멈추었다. 선우는 자신의 일기장을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두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선우의 얼굴은 그저 용감하고 대담한 고등학생의 모습이었다.
아침 9시, 선우는 일어나 세수를 한 후 옷을 단정히 입고 집을 나섰다. 마을 광장으로 가니 태호, 승재, 기철이가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명과 만난 선우는 꼬깃꼬깃한 쪽지에 적힌 주소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약 십분 정도 걸은 네 명은 문이 활짝 열린 대우의 집을 보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서는 저벅저벅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날도 어김없이 밤 12시에 선우의 그림자가 창문에 비춰졌다. 이 날 밤 입술을 굳게 다문 선우의 눈은 더 크고 맑게 빛났다.
1960년 2월 27일, 비 옴
쪽지에 적힌 주소를 따라 각 학교의 학생들이 대우의 집에 모였다. 경북고 각 학급 실장, 부실장을 비롯하여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등의 학생들이 모여 우리들만의 상호 연락망을 만들고 내일 학교 조회단에서 낭독할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대우는 내일 선생님들께서 우리를 막아설지도 모르고, 경찰이나 군인들이 무력으로 우리를 제압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대우의 말을 듣고도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뜨거워졌다. 드디어 내일, 결전의 날이다. 대우의 말처럼 우리의 뜻을 거역하는 장애물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섭다면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대우의 집에서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낭독문이 적힌 큰 종이에 우리의 이름을 새겼다. 그 종이에 새겨진 우리의 이름이 헛되이지 않게 할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시위 준비를 해야하니 오늘은 일찍 잘 것이다. 아 참, 물론 내가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반드시 비밀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오늘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나만큼은 시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걱정하셨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 없는 동생들은 그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 한다는 것을 아픈 어머니께서 아시면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지실 것이고, 아버지는 나를 방에 가두고 꼼짝도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다. 혹시나 운이 안 좋아 경찰에 연행되거나 시위 장소에서 죽게 된다해도 우리 가족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먼저 가버린 나를 미워해주었으면.
1960년 2월 28일, 지난 날 비가 무척 쏟아져서 그런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을 비롯한 학생 대표들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선우와 학생들의 마음 속 깊이 작은 불씨가 점점 커져 활활 타올랐다. 뒤이어 학생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오후 1시, 그들은 앞에 막아선 교사들을 제치고 대구의 중심,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했다. 경북고생 800명과 대구고생들이 합쳐져 마침내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중앙통 매일신문사, 경북도청,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현재 정권의 불의와 부당함을 규탄했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구타했다. 하지만 선우는 이에 지지 않고 큰 함성을 지르며 대항하였다. 다행히도 시민들이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동조하며 선우와 태호, 승재, 기철이는 잠깐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한창 시위가 진행되고 있던 그때, 경북사대부고와 대구상고 등의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는 수성천변 유세장으로 가 시위를 계속했다. 선우와 친구들은 한 시민의 도움으로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비상 연락망으로 이 소식을 들었고, 매우 기뻐한 듯했다. 그렇게 다시 시위대에 참여하려고 할 때, 경찰이 뒤에서 기철이의 머리를 세게 쳤다. 태호와 승재는 서둘러 도망쳤지만, 선우는 경찰에 체포될게 뻔한 기철이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피를 흘리는 기철이는 털썩 주저앉으면서도 선우를 체포하려는 경찰들을 붙잡으며 선우에게 얼른 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선우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시위대 안쪽으로 도망쳤다. 서둘러 태호와 승재를 찾던 선우는 길 건너편에서 경찰에 잡힌 둘을 발견했다. 선우의 눈이 붉어지고 충혈되었다. 손과 발은 부들부들 떨렸다. 선우는 시위대를 제치고 태호와 승재에게로 향했다. 경찰은 선우를 보더니 순식간에 다가가 경찰봉과 구둣발로 선우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몇 십분이 지났을까. 선우의 눈이 반쯤 풀려있었고 몸 곳곳에는 피가 철철 흘렀다. 경찰은 선우를 뒤로 하고 태호와 승재를 끌고 가버렸다. 그리고 선우의 눈 앞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동생들이 보였다. 아버지는 힘 없이 누워있는 선우를 자신의 무릎에 눞혔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바로 달려온 듯 정장 차림에 낡은 가방 하나가 팔에 걸려있었다. 선우의 가족은 정신 좀 차려보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선우는 옅은 신음을 내뱉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며칠 후, 대구 지역 언론이 ‘2·28 대구학생의거’를 전국에 보도하기 시작했다. 8개의 학교 총 1,200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내용과 각 학교의 교사들은 책임추궁을 받았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선우는 보도된 신문을 보자마자 그 신문을 자신의 방에 가져와 일기장과 함께 서랍에 보관하였다. 선우의 몸은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고 붕대에 칭칭 감겨 있었다. 선우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선 또 한 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고 싶다 모두들, 이렇게 말하니까 더 보고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