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선(심사위원장상)
꿈걸음
청주서원고등학교 1학년 김민선
기억하십니까? 학교 옆엔 공원과 이어진 긴 도로가 있습니다. 도로 건너편엔 시장도, 토끼를 사냥할 산도 없었습니다. 온통 공장, 사단 법인의 연속이었으므로 우리는 그 도로를 건너갈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유인물을 가져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졌습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괴음이 들어왔습니다. 원인 불명한 소리의 행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도로 건너편에서 함성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호기심에 창문으로 바짝 다가갔습니다. 도로의 끝과 끝이 까맣게 물들어 꾸물거렸습니다. 저것은 사람이었습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저것은, 검정 교복을 빼입은 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점차 도로 앞 변으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 사이, 감색의 어떤 것들이 빠르게 동작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번득 우리들은 고등학생들을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인도 모른 채, 목이 쉬어라 소리 질렀습니다. 비록 뚜렷하진 않았지만, 우린 확신했던 것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것들이 고등학생들을 마구 구타하고 있었음을요. 감색의 사람들은 두꺼운 곤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곤 선량한 고등학생들을 마구 쳤습니다. 검정 교복이 찢기며, 그 속의 새하얀 셔츠가 불온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이 눈 안에 선합니다. 전날 형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불현 듯 떠오릅니다.

-문송아, 세상은 곧 바뀔 거야. 일주일 전에 엄마가 투표하러 가셨잖아. 그게 다 가짜였대. 참관인이 어떤 투표함 하나를 실수로 엎어버렸나 봐. 그 투표함엔 미리 기표해둔 투표용지가 있었고. 모든 게 거짓말이었던 거지. 모든 게 다.

-경찰은? 어른들은?

-문송아. 어른들은 나서는 걸 싫어해. 상황은 악화되는데 먼저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없어서, 학생들이 힘을 합친 거야. 저질러진 부정선거 다시 하라고. 비리가 드러났잖아, 대통령 선거에서. 그건 우리 모두의 치욕이니까. 그리고 경찰은 말이야, 사실 좀 그래.

-사람은 충분히 많았잖아. 왜, 왜 형까지 나가려고 하는데.

-여긴 우리의 나라잖아. 그리고 우리라는 말엔, 그 사람들이 있고... 나도 있을 테니까. 난 무섭지 않아. 경찰을 가장한 마귀들이 곤봉을 내리쳐도 피하지 않을 거야. 여긴 내가 태어난 내 나라잖아.

어영부영 수업을 마치고 나는 도로변으로 향했습니다. 확 깨어난 정신이 내게 무언가를 끌어들였습니다. 사람들은 도로와 공원의 접점에 뭉쳐있었습니다. 형도 어디엔가 있을노릇이었습니다. 저마다 각기 다른 현수막을 들고 같은 지점을 보았습니다. |부정 선거 철폐, 청렴 선거 재게 |허위 경찰 민간 사살 불가 교실에서 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목소리가 섞여 어지러웠습니다. 그 순간 어떤 감정이 서서히 끓어올랐습니다. 심장이 요동치고 뜨거운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나는 흰 천과 함께 어머니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흙냄새를 풍기는 흰 천에는 빗물과 먼지, 솔잎 몇 가닥이 끼어있었습니다. 아마 어머니는 그런 것들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으셨겠죠. 흰 천을 벗겨낸 곳엔 키가 다소 줄어든 제가 있었거든요. 저는 그때 갈색 빛 신발을 쥐고 있었습니다. 희고 먹먹한 그 어린 날에,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절대 더럽히지 않을 거라던 약속이 허무해집니다. 어머니는 도저히 신을 수 없는 신발 한 짝을 가슴팍에 넣고 가쁜 숨을 쉬었습니다. 곱게 굳은 시체로부터 악취가 흘러나옵니다. 어머니가 꼭두새벽까지 일하며 먹여 살린 아들은, 금방 무기력해져 손끝 하나 뻗지 못했습니다. 그 몹쓸 짓을 하고서도 어머니 곁에 돌아와 다행이라고 여기다니, 저도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어머니. 만일 달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달의 모양을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은 막연하고 점차 메말라가지만, 그것을 바꿀 수 있기에 우리는 존재했습니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붙잡은 채 악착같이 외쳤습니다.

-피를 보아라. 피를 보아라.

우리라고 무섭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은 만큼,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 또한 절실했습니다. 그 염원을 등에 업은 채, 뛰었습니다. 가시가 돋친 길을 맨발로 달렸습니다. 희미한 걸음은 우리였기에 뚜렷해졌고, 마치 꿈을 꾸는 어렴풋한 동안의 일 같았습니다. 고지가 눈앞에 선하기에 더욱 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나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뜨거운 심장 안에서 아직 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