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모래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끈질긴 풀
신명여자중학교 1학년 박유빈
지겨운 학업 속에 봄방학을 보내던 2월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니?”하고 물으셨다. 할아버지 생신? 할머니 생신? 아니지, 증조할머니 제삿날도 2월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우물쭈물 답을 찾지 못하자, 할아버지께서는 “지금부터 눈을 지그시 감고는 내 말을 잘 들어보거라.”라며 마치 동화 속 마법사가 할 법한 대사를 말하신다.
잠시나마 수학문제에서 벗어날 구실을 찾은 난 속으로 오예를 부르며, 겉으로는 엄숙한 척 “예”, 하고 말했다.
“1960년, 오늘과 같은 날짜, 2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란다. 그래, 지금으로부터는 60여년전이지. 까마득한 옛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지만, 그 일을 실제 겪은 사람들에게는 마치 어제처럼 생생히 느껴진단다.
그때 당시의 우리나라는 마치 황무지 같았단다. 그 어느 곳보다도 고독하며 혹독한 황무지였지. 우리나라 정부는 이 고독한 황무지에서는 마치 모래 바람 같았다. 이 모래 바람은 대한민국의 땅에 독재라는 바람을 일으켜, 우리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 정권을 지속적으로 거머쥐고 싶었던 정부는 급기야 부정선거까지 계획했단다. 그러고는 상대 당인 야당의 부통령 선거운동인 수성천변유세장에 사람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지.
유세하는 날이였던 2월 28일 일요일에 각종 행사를 여는 한편, 정치에 민감했던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유세장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 방침을 내린 게야. 그러던 어느 날, 실낱 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던 이곳에 작고 여리며, 힘없는 풀 몇 가닥이 자라났단다.
너무나도 작고 약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모래 바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한 가녀린 생명들인 듯 했지.
겉으로는 약해서 금방 픽 쓰러질 것 같지만, 그들은 부당한 정부에 용감하게 대응했단다.
이런 풀떼기들의 역할을 한 이들은 바로 고등학생들이였단다. 너보다 많아봤자 몇 살 더 많을, 아직까지 너무나도 어린 학생들이었지. 일요 등교 방침이 알려진 직후부터 학생들은 각 학교별 긴급 회의를 열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학교에 일요 등교를 철회해 줄 것을 요구 했단다.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북고, 대구고등의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조성하기로 하고 결의문을 작성했지. 그리고 2월 28일 12시 55분, 학교 조회단에서는 누구보다 당차고 서슴없는 학생들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단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 낭독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어.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지. 경북고생 800여 명을 비롯한 대구고, 대구상고 학생들 등이 함께였지. 주변의 시민들이 학생들에 동조했고 마치 오아시스처럼 그들을 도와주고 숨겨주었단다. 풀 몇가닥이 한 포기, 두 포기가 되고, 곧 열 포기가 되는 순간이었지.
그들은 하나는 작고 둘도 보잘것 없는 풀떼기들일 뿐. 누구보다 힘없지만, 사실 누구보다 끈질기고 꿋꿋하며, 용감한 존재들이었단다. 조그만 풀떼기들은 뿌리를 내리고 모래바람의 독재에 힘껏 저항했단다. 저항의 길은 힘겹고 잔혹했지만, 우리의 굳건한 학생들은 끼리끼리 끈끈히 엉겨붙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지. 모래바람의 진압이 그들을 무참히 짓밟아도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어.
2·28 민주운동은 후에 일어난 4.19혁명, 5.18민주화 운동 등에 큰 영향을 미쳤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운동이라는 데에 의미가 크지만, 사실상 많은 학생들이 그날로 인해 희생되었단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약간 잠겨있었다. 나는 놀라서 두 눈을 뜨고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천장을 응시한 채, 눈물이 자글자글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듣고 있던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때 당시의 고등학생들은 정부의 부정부패를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저 학생일 뿐이고 어렸지만, 옳지 못하다고 여기는 일은 바로 잡으려는 당당한 학생들이었다. 모두가 침묵하고 어른들마저 두려워 나서고 있지 않을 때 민주주의의 막을 그들 고등학생들이 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어떤 어른이 주도하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스스로 시위를 주도하고 결의문을 작성하고 부당한 정치에 저항하였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민주운동이 더 뜻깊게 여겨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나도, 우리 학교의 많은 다른 학생들도 부당한 일을 마주하게 된다 해도 그 당시 고등학생들이 그랬듯 나서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슴없이 나섰다.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대담함과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그들에게는 부당함에 대한 화와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지 밖에 없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공동체가 만들어낸 큰 힘 일지도 모르겠다. 혼자서는 잠깐 생각하고 손사래 칠 일이지만, 함께하니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
“할아버지, 1960년대라면, 할아버지께서도 고등학생 때쯤이 아닌가요? 할아버지도 이 민주 운동에 참여하셨나요?”
할아버지께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얼핏 본 우리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깊은 세월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겠지. 많은 일들이 많고 많은 기억들로 할아버지의 머릿속의 한 부분씩을 차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중 오늘 할아버지께서 털어놓으신 기억이 그 기억들 중 가장 아픈 기억의 한 조각이 아닐까. 할아버지도 다른 고등학생들처럼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힘껏 소리치고, 경찰의 총에 맞은 친구들을 보고, 두려워하고, 작고 위대한 풀 한 포기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을 터였다. 새삼스럽게 우리 할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본받고 싶어졌다. 동시에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손녀로서 그 당시 청소년들의 용기와 그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나도 기회가 된다면,
아니 지금부터라도 모래바람에도, 혹독하고 추운 날씨에도 굴복하지 않는 조그만 풀 한 포기가 되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