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선(심사위원장상)
동방의 꺼지지 않는 불꽃
포산중학교 1학년 최선우
1960년 2월 27일 토요일.
오늘도 여느때와 같이 학교를 등교했다. 오늘만 지나면 내일은 일요일, 휴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도착했다. 하지만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이때 예상했다. “뭔가 있구나.” 하교를 하고 친구들에 이끌려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의 집에 모였다. 그곳에는 경북고,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학교 학생을 합쳐 8명 정도가 모였다.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으로 보이는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기 모인 이유는 대충 짐작하지?” 다른 친구 몇몇이 말을 꺼냈다. “당연하지” 다시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친구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일요일에 까지 학교를 나가야 한다니 말도 안돼! 이건 학원을 정치 도구화 하는 거라고 우리모두 힘을 합쳐 부패한 정권에 맞서 싸우자!” 그러고는 결의문을 작성했다. 이후 우리는 2월 28일 일요일인 내일 모여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이 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조그마한 불씨가 크고 화려한 횃불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오늘은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우리는 시위를 위해 학교에 모여 학우들에게 시위에 참여 할 것을 알렸다. 그러자 모두 이에 동의하는 눈치였고 우리는 조회단에 올라 격양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기 시작 했다. 그러자 흥분이 고조된 학우들이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이후 학우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교문을 뛰쳐나와 큰 소리로 소리쳤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화도구로 만들지 말자”라고 외치며 앞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나섰다. 우리는 대구의 중심지인 반월당과 중앙로를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 중 어제 함께 회의했던 다른 학교의 학우들도 달려나와 힘을 합쳤다. 우리는 1200명 정도나 되는 학우들과 함께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나아갔다. 이 때 모두가 알았다. 우리마음속의 작은 불씨가 커지려하는 찰나라는 것을... 하지만 계속 순조로울 수는 없나보다. 순조롭던 찰나 경찰이 나서서 시위를 진압했다. 방금 까지만 해도 내 옆에서 함께 시위를 했던 학우 몇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시위가 계속되는 길거리에 시민들이 경찰에게 달려들어 체포하는 것을 뜯어말렸다. 이제서야 잡혔던 학우들이 풀려나고 시민들의 응원을 받고 다시 힘차게 일어나 시위를 계속해나갔다. 우리는 경북도청 앞에 우뚝섰다. 도청 앞에서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쓰러졌다. “내가 왜 쓸어졌지?” 하며 뒤를 봤는데 몽둥이를 들고 서있는 경찰이 있었다. 나는 쓰러져서 시위를 하는 학우들을 봤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눈이 감겼다. 몇 시간 뒤 깨어났다. 내 침대 위였다. 고맙게도 학우 한 명이 나를 업고 집에 데려다 준것이었다. 나는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지만 너무 아파 나서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 학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까? 시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목적은 이뤘을까? 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난 다시 잠이 들었다.
1960년 3월 2일.
완전히 회복하고 다시 학교를 등교하는 날이었다. 난 27일 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학우들은 오랜만이라는 듯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우리의 작은 희망의 불씨가 드디어 큰 횃불이 됐어!”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성공의 기쁨을 느끼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물었다. “다른 학우들은 무사해?” 그러자 학우들이 모두 무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안도했고 학교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큰 횃불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 그 촛불이 다시 한 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