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상(심사위원장상)
2·28을 돌아보며
경북공업고등학교 2학년 김근호
참담했던 1960년의 한국, 십수년 째 계속된 이승만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몰아갔고, 비민주적 개헌과정을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권력을 강화하는 등 모든 비인권적이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한편, 3.15 정,부통령 선거를 위한 유세가 대구에서 예정되어 있어 학교에서는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요일에 등교를 시키게 된다.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 방침이 알려진 직후부터 각 학교별 긴급회의 등을 열어 부당함을 지적하고 학교에 일요등교를 철회하여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각 학교 학생들이 모여 부당한 일용등교에 대한 시위를 조치하기로 결의문을 작성하게 된다. 2월 28일 낮,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 낭독은 격앙되어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여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오른 것이다. 28일 오후 1시경 경북고생 800여 명이 대구 중심부인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했으며 교문돌파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고 학생들도 마침내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대구는 곧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시위대는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 매일신문사를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상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불의를 규탄하였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박수치며 동조했다. 곧바로 시위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경대사대부고와 대구상고 등의 학생들은 교내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거나 학교 담을 넘어 시위에 합류했으며 수성천변 유세장으로 간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등의 학생들도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시위현장에서 약 22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각 학교의 교사들도 모진 책임추궁을 받게 되었다.

2·28은 단순히 일요일 강제 등교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국민들의 삶이 무너진 시대적 상황에 대한 학생들의 절박한 인식과 3.15 선거를 앞두고 자행된 야당 부통령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내려진 일요일 등교라는 정권의 음모를 간파한 학생들의 분노에 기인한 것이었다. 가장 엄혹한 시기에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외친 2·28 함성은 전국을 덮었다. 2·28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뿌리로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민주주의 실천 운동이었다. 이러한 2·28 운동의 설명을 듣고 난 후의 나의 생각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평범한 당시 고등학생들이 가장 앞에서 민주화를 외치며 시위를 진행하였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2·28 민주운동의 정신은 우리 사회의 시대적 요청이 상생, 통합의 선진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정신적 자산으로 계승, 발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