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그들이 있었기에
포산고등학교 1학년 우현석
강렬한 햇빛으로 더위마저 몸을 사리는 여름날, 나는 그곳을 방문했다. 동성로 축제가 열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공원에서 인파를 뚫고 내가 발견한 건 매끄러운 돌에 새겨진 찬가였다.
‘타오르는 젊은 함성 독재의 어둠 밀어내니-’ 나는 민주화가 무엇인지 몰랐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민주(民主)는 나에게 그저 잘 살기 위한 열망일 뿐, 고귀한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미약하다고 생각했다. 대충 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발전한 게 아닐까. 하지만 이런 오측은 이번 기회에 성취할 발상의 전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학에 관심이 쏠리는 요즘, 나는 2·28 민주화운동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문학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듯 ‘민주화’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민주화의 사전적 정의는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다. 뻔하지 않은가? 다르게 말하면 주권이 국민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화운동이란 주권을 국민에게 종속하기 위해 결의하는 것, 재미없지만 그렇게 정의 내릴 수 있다. 2·28 민주화운동도 이 정의를 내포한다.
1952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 헌법 개정인 발췌개헌, 만인의 공분을 샀던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8년 후인 1960년, 당시 86세였던 이승만은 자신의 당선뿐만 아니라 권력승계자 1순위인 부통령의 당선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대구의 큰 공헌을 기반으로 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자가 1956년 당선에 이어 이승만 정권을 위협하는 상태였고, 이승만 정권, 자유당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첫 번째 자유당의 고비는 2월 28일에 예정된 장면의 유세로부터 시작이었다. 많은 국민의 이목이 쏠린 장면의 수성천변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자유당은 학생들의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지금 생각해도 자유를 심각하게 빼앗는 이 지시는 학생들을 억제하기는커녕 학생들을 탈억제의 집단으로 변모하게 하는 방아쇠를 당겼다.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를 포함한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민주의 눈을 떴다. 2월 28일, 높게 둘러싸인 담장을 넘어 연필과 지우개 대신 명령 철회 요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시민들과 상가의 상인들은 경찰들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치료해 주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의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화하여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학교라는 좁은 공간에서 피어오른 작은 불씨가 민주화라는 바람을 만나 대구를 삼키는 거대한 불꽃이 되었다. 간절한 바람이 일으킨 바람이 불었다. 어린 고등학생들은 세상을 울렸고, 이 떨림은 3.15 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2·28 민주화운동은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시민들이 민주적 개혁을 요구한 최초의 시위이다. 민주 의식을 바탕으로 실천적 정신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최초의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 2·28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하나 있다. 앞서 언급한 4.19 혁명은 1960년 3월 15일, 권력 유지에 어려움을 느낀 이승만 정부가 권력 유지에 어려움을 느끼고 당선에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사태로부터 비롯되었다.
2·28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채 식지도 않았을 무렵, 부정선거에 반발한 학생 중 하나였던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고, 정부에 반발한 고려대 학생들이 폭행당하는 등 꺼질 듯한 불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사건이 연거푸 발생했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일으킨 민주화운동을 말미암아 국민이 분노하는, 국민이 주도하는,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거센 민주화의 열기에 힘입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하야를 선언한다. 이 특별하고 연쇄적인 작용은 내 마음을 크게 울렸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화운동이며,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과정이다.
무언가의 시작은 항상 미약하다. 새의 날갯짓이 일으킨 파동이 거대한 파도를 불러오듯 미약한 시작이 있어야 창대한 끝이 있다. 2·28 민주화운동도 그와 같다. 대구의 학생들, 그것도 나와 같은 공립 고등학교의 고등학생들이 만들어 낸 날갯짓이 4.19 혁명으로 이어지고, 결국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2·28 민주화운동에는 그저 임시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민주운동이라는 단편적인 의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국가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여러 크고 작은 투쟁의 출발점이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운동이었다는 부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이런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역사를 보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희생과 땀이 필요하다.’ 이에 걸맞게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희생과 땀이 있었다.
2·28 민주화운동과 4.19 혁명이 절대 분리되지 않고 밀접하게 연결된 사건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민주화를 소리 높여 외친 수많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강렬한 햇빛으로 더위마저 몸을 사리는 여름날, 나는 2·28기념중앙공원을 방문했다. 매끄러운 돌에 새겨진 찬가가 기억에 남는다. ‘타오르는 젊은 함성 독재의 어둠 밀어내니-’ 나는 민주화의 티끌을 붙잡아 그 모습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이젠 ‘타오르는 젊은 함성’이 무엇인지 안다. ‘독재의 어둠을 밀어내니’의 의미를 안다. 2·28 민주화운동과 같은 민주화운동은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 민주(民主)가 고귀한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1960년 2월 28일, 담을 타 넘은 고등학생들의 열망은 2022년, 한 고등학생에게 닿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찬란한 우리가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