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김재영에게
서동중학교 1학년 조 은
내 이름은 조인직. 실업 야구팀 한국 신발 소속으로 야구를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대구상고의 졸업을 기다리며 한국 신발과 계약을 했다.

대구상고는 내 졸업 시즌에 청룡기, 봉황대기, 대통령배 야구 대회를 격파하고 다니며 위상을 떨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고교야구 최초 5할 타자가 바로 나였으니까. 내 포지션은 내야수다. 내야 모두를 볼 수 있고, 가끔은 투수로도 등판했다. 쉽게 말해 투타겸업.

실업팀 입단 예정일 하루 전인 2월 28일, 모교인 대구상고 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대구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는데, 나도 역시 그 자리에 참여했었다. 나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구상고 2학년인 당시, 갑자기 투수로 마운드에 오를 일이 생겼다. 내야수인 나는 투수 글러브가 없었고, 결국 친한 투수 형에게 글러브를 빌린 후 등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운드에 올랐을 때, 갑작스럽게 퇴장을 명령받았다. 글러브 웹-야구 글러브에서 엄지와 검지를 이어주는 부분-에 민주화에 대한 글이 적혀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정치에 문외한이였던 나는 도대체 무슨 말들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 한 문장, “대통령은 하야하라.” 이 말만이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일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조사관이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정신이 없어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기억나는 질문은 “이 글러브에 왜 이런 글을 적었지?” 정도. 난 억울했기에 “전 글러브를 빌린 것 뿐이에요”라고 답했다. 조사관은 나더러 바른대로 말하라며 몽둥이를 들었다. 그때 마침, 친한 투수 형-고교야구 최고의 투수 김재영-이 나에게 글러브를 빌려준 사실을 말하며 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김재영은 조사를 받았는데, 그 후 그의 행방은 아무도 모르는 걸로 안다. 어쩌면 김재영을 담당했던 조사관들은 알 수도 있겠지.

김재영이 조사 받기 전 날, 난 김재영과 시장에서 같이 순대국밥을 먹었다. 김재영은 나에게 자신 덕분에 내가 고생했다며 미안해했다. “급하다고 설명도 듣지 않고 등판한 내 잘못이지.”라고 난 받아쳤다. 그는 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조사받으러 가고 난 후 내게 연락이 닿지 않으면 나는 고문 받아서 죽은 거야. 내가 사라지거든 이 편지를 신문이든 벽보든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에게 꼭 공개 해줘.” “응..” 어딘가 찝찝하지만 일단 그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저는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제 한을 꼭 풀어주십시오’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장롱 속에 깊숙이 숨겨두었다. 이후 김재영의 실종 사실은 금방 퍼졌다. 고교야구 최고 투수의 실종이니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정부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표했고, 나 역시 그의 실종을 믿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난 명문대 정치과에 다니는 사촌형에게 정치에 관해서 배웠다.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헌법을 바꾼 사실도 그때서야 알았다. 김재영이 왜 투쟁 했는지 알게 되었고, 뒤늦게 화도 났다. 그래서 나는 2·2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비록 대통령을 하야 시키지는 못했지만, 최전방에서 시위를 하며 여러 기업인들을 알게 되었다.
앞에서 서술했듯, 난 최전방에서 시위를 했기에 당연히 경찰들에게 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이 왜 사람들을 꼬드겨서 시위를 하냐고 따지듯 물었다. 난 “왜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 고문을 하는 건 되고, 정당한 시위를 하는 건 금지 되냐”고 역으로 물었다. 조사관이 “묻는 말에나 대답 해!”라고 해서 “내 질문에 답을 해 줘야 나도 답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경찰관은 화가 났는지 몽둥이를 들었다. 나는 “당신들이 김재영을 고문하고 살인했지? 김재영이 나에게 편지를 보냈어. 나는 풀어준다면 그 편지는 공개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조사관은 그렇게 날 풀어줬다. 교도소 안에 있거나 죽으면 김재영의 편지도 아무 효과가 없는데 나를 왜 풀어줬을까. 조사관이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인지, 아니면 고위 간부가 능력 있는 사람 대신, 능력 없는 사람을 비리를 저질러서 채용한 것인지는 모른다. 풀려난 후 오후 7시쯤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어딘가 분주한 곳이 보였다. ‘아, 오늘이 1960년 3월 15일, 선거하는 날이구나..’ 난 지금도 투표가 가능한지 물어보려다 개표소에서 대화를 엿들었다. “아, 각하님 표로 바꾸기 귀찮은데 그냥 선거를 안하면 될 것인데..” 한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한 여자가 “그래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크잖아. 조금만 참아.” 난 그 말을 듣고 부정선거가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챘다.

다음날, 민주화운동으로 알게 된 기업인들과 함께 모여 2·28 민주화운동을 전국적으로 퍼트리자고 기획했다. 그들의 자본력과 인맥이면 불가능은 아니였다. 나는 그들에게 김재영의 편지를 보여줬고, 그들은 더욱 열의에 불타올랐다. 우리는 김재영을 위해 김재영의 생일인 4월 19일에 시위를 시작하기로 했다. 대구 담당인 내가 한국 신발 선수단과 대구상고학생들을 이끌며 다른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시위이다 보니, 2·28 민주화 운동 때 보다는 시위를 저지하는 군인들이 적었다. 덕분에 우리는 더 강하게 싸울 수 있었고, 마침내 승리했다. 부패한 독재자 이대통령은 하와이로 이주하며 대통령직에서 하야했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새 대통령을 뽑았다. 야구라는 인연으로 나에게 민주주의를 심어준 김재영에게 이 일기를 바치고 이 기쁜 소식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