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그날의 외침은 그치지 않았다.
동도중학교 3학년 강민서
2016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정치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나라의 대표자인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때 학생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래서 시내에 나가 밥을 먹다가 광장에서 촛불 시위하는 것을 보고, 부모님께 촛불 시위에 나가게 해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다. 식당에서 나와 광장으로 갔을 때, 비록 촛불 시위가 끝난 뒤였지만, 그때만큼 가슴이 뜨거웠던 적이 없었다. 아마 2ㆍ28 민주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도 뜨거운 열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을 느꼈기에 자신의 안위도 잊은 채 거리로 달려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2ㆍ28 민주 운동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벌인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에 집권했던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이 민주당의 유세를 들으러 가는 것을 막기 위해 2월 28일 일요일, 학생들에게 강제로 등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일요일 등교의 목적을 간파한 학생들은 학생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며 들고 일어섰다.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탄압이 있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학생이 시위대에 동참하여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이 앞장선 대구의 민주 운동이 전국에 알려지게 되자, 이는 대규모의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60년 당시, 자유당이 경쟁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부정 선거도 서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학생들이라도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교사들, 그리고 다른 어른들마저 정부의 명령을 하는 수 없이 따르려 했는데도 어린 ‘학생’들이 나서서 시위에 앞장섰다는 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학생들이 폭력적인 시위를 벌이지 않았음에도, 정부에서 학생들을 구타했다는 것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학교 정학, 퇴학 등의 조치가 아니라, 신체적인 폭력을 통해 학생의 의지를 굴복시키려는 것이 말이다. 나였다면, 시위대에 참여했다가도 그러한 처벌이 두려워서 은근슬쩍 대열에서 빠져나왔을 것 같은데, 그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더 불타오르게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만약 정부에서 촛불 시위를 탄압했다면, 아마 시위에 나가고자 하는 열망이 금방 식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에, 2ㆍ28 민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민주운동을 해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나보다 더 용기 있는 의인들이 민주주의적 사회에서 살 수 있게 해 준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사실 2월 28일은 3월이 되기 전, 2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봄이 시작되는 3월의 전날, 겨울의 끝자락이라는 이야기이다. 민주주의라는 씨앗이 싹틀 수 없었던 그전의 상황을 겨울이라고 표현한다면, 진정한 봄의 시작은 2월 28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 비로소 민주주의라는 씨앗이 싹트고, 비바람도 견디면서,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활짝 꽃도 피우며 큰 나무로 자라왔다. 그렇지만 나무로 자란 것만이 끝이 아니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물과 양분이 필요하듯이, 민주주의라는 나무에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을 어른들의 일이라고 외면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1960년 2월 28일 학생들의 외침이 의미 있는 메아리로 영원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