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독재의 부당함에 맞선 모자
성지중학교 2학년 김예원
1960. 4. 11. 마산의 부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물속에서 무언가가 건져 올려지기 전까지는. 1초가량 정적이 흘렀고 그다음에는 비명과 탄식과 울음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마산 부두에서 건져 올린 것은 시신이었다. 몇 시간 전 낚시를 하러 온 박 씨가 물에 아주 조금, 흐릿하게 떠있는 물체를 보았다. 이게 무엇인가 궁금해하며 몸을 기울이다가 흉측하게 망가진 사람의 머리로 추측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라 주변에 알림으로써 시신이 건져진 것이다.
시신은 머리가 심하게 함몰되어서 신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입혀져 있던 교복과 대부분이 찢어진 명찰이 있었기 때문에 김씨 성을 가진 고등학생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1960. 4. 12.
한 여성이 대구에서 마산까지 찾아왔다. 자신이 마산 부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김씨 성을 가진 고등학생의 모친이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그녀는 애써 차분한 척하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했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결국 애통하게 쏟아내기 시작한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가 여태껏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은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녀의 아들은 금년 2월 28일에 있었던 민주운동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그때는 경찰의 구타로 인해 다친 것 외에 큰 부상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안도하며 다시는 그런 위험하고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혼을 냈다. 그런데 3월 15일 부정선거가 이루어지고 난 뒤 아들은 갑자기 ‘어머니, 저는 마산으로 떠납니다’라고 적힌 쪽지만 남긴 채 사라졌고 어제 그렇게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일기장 하나를 내밀었다. 사흘 전 아들의 방에서 찾아낸, 아들이 쓴 일기라고 했다.

1960. 3. 15. 일기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방금 접하였다. 투표를 할 때부터 이전과는 달리 강압적인 공개 투표를 계속 밀고 나가더니 그 결과가 이기붕의 79퍼센트 득표율 당선이다. 이런 부당한 상황이 우리 국민들을 바보로 보아 무시하고 또 기만하였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정부의 처사 외에 무엇을 더 말하고 있겠는가? 금년 2월 27일, 나는 동무들과 함께 모여 그다음 날이었던 28일 일요일 등교 방침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작정하고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28일 등교 지시는 우리가 그날 장면 후보자의 유세장에 참석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책략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크게 분노하였다. 계속되고 있는 이승만 독재 정권이 우리의 삶을 끝도 없이 통제하여 짓누르고 있었다. 2월 28일, 학생부 위원장이 조회단에 올라가 동무들과 함께 작성했던 결의문을 낭독했다.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어떠한 불길이 솟았다. 아마 다른 동무들도 그랬을 거라 짐작한다. 우리는 학교를 뛰쳐나갔다. 선생들이 우리를 말리려 애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무시한 채 쭉 달려갔다. 대구는 곧 여덟 학교 학도들의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커다란 함성으로 뒤덮였다. 이후 경찰들이 들이닥쳐 우리를 마구잡이로 구타하였고 시민분들께서는 우리를 숨기고 보호해 주려고 애쓰셨다. 그날 현장에서 나의 동무들을 포함해 2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추궁을 받았다. 그러나 대구의 언론이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이것을 크게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학생시위가 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도 금일의 부정선거로 인해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또다시 통제와 억압을 받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2월 28일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나설 수는 없는가? 그럴 수 있다. 나설 수 있다. 나서야 한다. 내가 그날은 큰 탈 없이 무사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1960. 4. 18. 어머니의 일기
사흘 전, 사람들이 나를 불렀습니다. 불려간 곳에는 내가 잘 아는 이웃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고등학생, 고등학생들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아이들까지 전부 모여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가오는 4월 19일에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아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일주일 전에 알게 되자 이에 분노하여 자신들도 시위를 벌이고 싶었다고. 나에게는 참여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니오, 나도 참여할 것입니다. 내 아들이 바친 목숨을 헛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아들을 죽게 한 것들을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당한 일에 같이 분노하고 또 용감하게 나서주는 이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감동받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내일이 바로 그날입니다. 내일 나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죽는다고 해도 내 아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내일 벌어질 시위 이후에도 독재 정권이 계속될지를 내가 죽든 살든 간에 끝까지 지켜볼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나는 이 시위가 훗날에는 혁명이라고 불렸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