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동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동생의 빛나는 흉터
경북공업고등학교 2학년 박세혁
1960년 2월 27일 토요일
오전 7시 가족들과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동생이 내일 학교에 간다고 해서 엄청 놀렸는데 동생이 내일 학교 친구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한다고 했다. 듣자 하니 대구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등교를 지시했는데 그 이유가 단체 영화 관람이나 토끼사냥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을 참여하지 못 하게 하려는 것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또한 동생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오늘 경북고, 대구고를 비롯한 8개 학교의 대표 학생들이 모여서 시위 계획을 짰다고 한다. 규모가 커 동생이 다치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어제 늦잠을 자고 밖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일어나 밖을 봤더니 웬 우리 동생 또래로 돼 보이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문득 난 어제 동생이 한 얘기가 기억나 겉옷을 챙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어느 학교인지도 모를 아이들 사이에서 내 동생 병훈이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은 잇따라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야 김병훈!!!” 아무리 불러보아도 동생의 얼굴은커녕 머리카락도 안 보였다. 경찰들은 계속해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때리고 끌고 갔다. 또한 학생들을 향해 “이 공산당 녀석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상황을 지켜보던 어른들은 아이들을 숨겨주고 때리려는 경찰들을 막아섰다. 또 다들 뒤에서 응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결국 난 동생을 찾지 못했다. 저녁 아홉 시, 집 전화로 경찰에게 전화가 왔고 동생을 데리고 가라는 말에 곧장 동생을 데리러 갔다. 도착 한 후 동생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먼저 나에게 와서 평소처럼 웃어줄 거라 믿었던 동생은 구석에서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동생을 다그치고 말았다. 동생은 훌쩍이며 손을 내렸고 동생의 얼굴은 처참했다. 입술은 당장이라도 터질듯 부었고, 왼뺨에는 큰 상처가 있었다.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오늘 집 밖을 나서는 동생을 말리지 않은 후회와 동생을 이렇게 만든 경찰관, 이런 사회에 속해 있다는 생각에 헛구역질이 나온다.
1960년 2월 29일 월요일
어제 일이 있고 난 뒤 매체는 정말 시끄러웠다. 동생 말로는 대구지역 언론이 어제 일 덕분에 힘을 내서 있었던 일들을 보도했다고 한다. 나는 동생이 자랑스럽지만 동생의 얼굴은 여전히 형편없이 엉망진창으로 남아있다. 동생은 괜찮다는데 난 어제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쿵 한다.
1960년 3월 14일
동생의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질 때 쯤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정말 많이 일어났다. 모든 일이 2월 28일의 시위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일어난 거 같았다. 옆에서 곤히 자는 동생이 내심 자랑스럽다. 3월 8일 대전고에서는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를 하며 경찰들과 난투극을 벌었다. 그 밖에도 선거가 다가오던 14일엔 정말 많은 시위가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잡혀갔다. 도대체 왜 국민에게 무장을 하고 총을 겨누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자유를 원할 뿐인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 걸까? 이 일이 금방 끝나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1960년 4월 26일 화요일
동생의 상처가 완전한 흉터가 되고, 선거 이후 자유당은 여러 가지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마산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고, 당국은 강제 진압에 나서 다수의 사상자가 생겼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선언문 낭독과 19일, 학생들이 습격으로 인한 부상을 알게 된 국민들이 모두 분노해 반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무력으로 시민들을 제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다. 또, 25일 서울 시내 대학 교수단이 시위에 동참하며 더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하지만 오늘 대규모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해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2월 28일의 학생시위는 시민의 힘으로 나라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그때의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에 용기를 퍼트려 많은 시위 끝에 4·19혁명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숨 막히는 썩어버린 부패 정권의 행진을 끝나게 해주었다. 말도 안 듣고 노는 걸 좋아하는 마냥 귀엽기만 한 내 동생이지만 2월 28일에 큰 업적을 이뤘기에 지금 잔잔히 지나고 있는 귀한 시간들이 있는 것만 같다. 동생의 왼쪽 뺨의 흉터는 누구보다 아름다우며 역사의 한 증거이자, 모든 민주시위의 시발점이 되어 앞으로도 더 빛나는 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