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숨길 수 없었던 그 날의 힘찬 목소리들
대구경동초등학교 6학년 이수영
언제나처럼 유튜브를 보며 평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는 우연히 2·28민주운동과 관련된 영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영상 제목을 본 후 나는 호기심이 생겨 영상 재생 버튼을 클릭 해 보았다.
영상을 다 본 후 나는 2·28 민주운동에 대해 인터넷에서 조금 더 찾아보았다. ‘2·28 민주운동’ 이라 검색해 본 나는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볼 수 있었다.
2·28 민주운동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대구지역 고등학교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2·28 민주운동은 대구 8개의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정부가 등교 명분으로 내놓았던 것들 중에는 토끼 사냥, 영화 관람과 같은 그 누군가가 들어도 황당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실지적인 일요 등교의 이유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 당일이 일요일 이었기에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 이었다. 학생들은 그 후 일요 등교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며 이를 철회해 줄 것을 요구 했지만 이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리고 이에 여러 학교의 학생들은 시위를 조직하여 결의문을 작성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월 28일, 몇 명의 학생들이 함께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결의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않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나는 자료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나도 당시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 이었다. 현재 그 당시의 결의문을 읽어 보기만 한 나 자신마저 이러한 기분이 들었는데 1960년 2월 28일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학생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결의문을 낭독 했는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학생들의 결의문 낭독 후 대구는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힘찬 목소리로 뒤덮였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진심된 목소리로 인해서 경찰들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 주기도 하며 한마음 한 뜻으로 학생들을 도왔다. 시위는 저녁 늦게 까지 계속 진행 되었고 그 시위로 인해서 백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 되었다. 2·28 민주운동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되기는 하였지만, 대구의 용감한 학생들의 선택은 이 후에 4·19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형성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에도 교과서를 통해서 2·28 민주운동에 대하여 접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한 것처럼 자료를 더 자세히 찾아본 것은 처음 이였다. 이번 기회에 2·28 민주운동에 대하여 더 자세하고 깊게 알아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내가 만약 1960년 당시의 학생 이였다면 “과연 나는 그 민주운동에 참여 할 수 있었을까?” 또는 “나에게 그럴 만한 용기가 있기는 했을까?” 와 같은 생각도 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였으면 두려움 반, 정의심 반으로 인해서 갈등하며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해봄으로써 다시 한 번 그 당시 민주운동에 참여 했었던 분들의 대단함을 느끼고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에 만약 시간이 된다면, 대구 2·28 기념 중앙공원, 대구 2·28 기념 학생 도서관 등의 그 당시에 관한 여러 장소에도 방문해 보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는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했던 수많은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당시의 배경과 그 전개 상황, 그리고 그 사건이 만들어낸 결과를 잘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에 대하여 잘 알려야겠다.
다시 한 번 1960년 2월 28일 그 당시의 학생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차게 낭독했을 결의문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