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아빠의 자부심이 무너진 2·28민주운동 2학년
안양예술고등학교 신정연
아빠의 자부심이 무너진 2·28민주운동
우리 아빠는 K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큰 자부심으로 사신다. 민족자본가에 의해 대학이 세워졌고 이후에도 민족자본가에 의해 운영되었다 하여 민족 K대라는 자부심이다. 민주주의의 선봉에 섰다는 자부심도 있다. 1960년 이승
만정권의 불의에 항거하기 위한 4·19혁명보다 하루 앞선 4월 18일 민주운동을 시작했다 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18일에 기념식과 전교생이 마라톤경주를 한다. 아빠는 이 행사에 4년 동안 참가하여 학교에 대한 자부심과 4·19혁명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어느 날 아빠의 자부심이 무참하게 깨진 날이 있었다. 대구 출신 친구와의 대화에서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냐고 여쭤보니 이 자부심을 무너져 버린 일이었다고 한다.
아빠는 대학 친구들을 자주 만난다. 그럼 여느 때와 같이 대학에 대한 자부심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께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셨다고 한다. 자신들의 출신 대학이 4월 18일을 특별하게 기념
하시만, 친구의 아버지는 대구 2·28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하셨다고 한다. 아빠와 다른 친구들은 그 당시를 겪으신 생생한 이야기에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말씀을 하실 수가 없으셨다
1960년 당시 한국의 모습은 참담했다. 국민소득은 79달러로 세계 최빈국 소말리아보다 7배나 낮았고, 필리핀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이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경제 수준도 낮고 문맹인 사람들도 많았기에 부자이거나 정말 똑똑한 사람이어야
겨우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머리가 우수한 친구의 아버지께서도 틈틈이 신문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교에 다니셨다.
그래서 고등학생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선생님들 또한 대학을 나온 사람이 거의 없어 사회에서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고 학생들을 수준 높게 가르쳤다.
십수 년째 계속된 이승만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몰아갔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비민주적 개헌과정을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 권력을 강화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친 대구의 자부심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이는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일본에게 빌린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퍼
졌다.
그래서 대구의 선생님들은 이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학생들에게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고 가르치곤 하였다.
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하지만 대구 학생들의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정부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 지시를 명하였다. 일요일 등교의 명분은 조기 중간고사,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이었다.
당시 대구공고 학생회 임원이었던 친구의 아버지는 경북고등학교 학생회로부터 운동에 참여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자세히 알아보니 대구 여덟 개 모든 고등학교가 참여한다고 하였다.
임원들끼리 두 시간 넘게 토의한 결과 참여하기로 하였다.
상황은 생각보다 긴박했고, 긴장되었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2월 28일 정오에 결의문을 낭독 하였다. 결의문이 낭독되자 격앙되어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일부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
쳐나왔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오른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시위에 참가하였는데 잘못하면 경찰에게 체포될 뻔하였다. 다른 학교 선생님이 숨겨주셔서 다행히 체포되지 않을 수 있으셨다고 한다. 경찰 또한 모르는 척 넘어가는 일이 많았고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한 학생
들을 숨겨주었다.
당시 선생님들이 제자가 석방되도록 노력하였고, 선생님들이 굉장히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경찰들도 이를 동조하여 수감생활을 한 학생은 별로 없었다.
결국 4·19혁명은 2·28대구민주운동에서 시작하여, 4·18고려대 학생운동으로 이어지므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역사적 맥락이 있다. 1929년 광주에서의 학생의거, 1945년 신의주의 반공 학생의거, 1960년 2·28대구민주운동, 1960년 4·19학생혁명으로 이어진다. 4·19학생혁명은 세계 역사에서 학생운동으로 정권을 무너뜨린 전무후무한 사건인데, 이 시작이 2·28민주운동이니 얼마나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 아빠의 자부심이 무너질 만한 위대한 사건이다.
나도 이제 고등학생 2학년이다. 혹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용기를 가지고 나설 수 있을까. 나의 목숨이 걸려있고 우리와 같 은 학생들에게 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다면 무슨 선택을 할까. 아마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끄럽게 숨어버리고 말 것이다. 2·2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분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