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간섭에 우리가 우리임을 무시당한 채 억압받아야 했던 시절을 이겨내고 겨우 뿌리 내려 다시 얻은 우리 땅 위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독재 정권은 싹을 도로 짓밟아 버렸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여러 수단들을 동원하며 헌법을 개정해 장기집권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부통령이자 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장면 부통령의 지지율 강세로 인해 자유당 독재 정권의 유지가 불투명해지자, 1960년 2월 28일 예정되어 있었던 장면 부통령의 대구 유세 현장에 학생들이 참여할 수 없도록 조기시험, 영화감상 등을 명분으로 일요일 등교를 강요한다. 일요일 등교의 의도를 간파한 대구 8개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은 시위를 일으키기로 다짐하고, 같은 마음을 가진 학우들과 함께 교문을 나와 시청, 신문사 등을 거쳐 목소리를 낸다.
근대사를 배우면서 내 생각을 흔들었던 것은 이렇듯 시대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마다 학생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3・1운동, 6・10 만세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그리고 2・28 민주화 운동. 학생은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의 혜택 안에 있지만, 학생이라는 이름 탓에 자의식을 가진 온전한 인격으로 존중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사회에서 무언가를 촉망받을 때 학생은 그들 사이에서 완연한 어른이었고, 배제 받을 때 우리는 그저 하늘 높은 줄은 아는 아이로 대해졌다. 그 그늘로 들어가 나 한 몸 위한다고 학생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너무나도 미성숙하고 부끄럽게 여겨질 만큼, 그런 순간마다 학생들은 올곧게 저항해 왔다. 그중 내가 살아온 이 땅에서 일어난 2・28 민주화 운동은 학생들의 주도로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의미가 매우 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2・28 민주화 운동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더 큰 소리를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회가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제한하려 하자,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옳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헤쳐 온 학생들은 어른스러웠다. 어른스러움이 무엇이라고 내가 정의하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이 겨우 얻어진 마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그랬듯 모든 사람들에게 한 움큼씩은 그런 마음이 있거나,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용기를 돌아보지 않고 피워낼지도 모르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외면할 때, 학생들은 하늘이 흐려 해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속에 불을 피웠다. 학생들을 막는 공권력과 교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학교를 뛰쳐나오고, 혹은 단식까지 하며 서로 손을 맞잡고 불씨를 키워 나갔다. 대구는 금세 학생들의 목소리로 뒤덮였고, 그런 학생들의 모습에 용기를 잊었던 시민들도 다시 마음을 일깨워 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많은 학생들이 붙잡히고 구타당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당연한 요구에 따라오는 불합리한 폭력마저 각오하고 목소리를 낸 그들은 정말 타오르는 불꽃 같다. 또 책임져야 할 것이 많기에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거나 학생들에게 응원을 보냈다는 시민들의 행동 또한 용기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소리 내어 만든 큰 울림으로, 다시금 푸른 하늘을 열어 갔다. 시대는 그제야 비로소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렇듯 모든 시대는 변해간다. ‘영원함’이라는 말은 이제 낭만으로 여겨지듯, 또 그때 그 학생들이 바라본 어른들이 그랬듯 사람은 때로는 변하고, 또 그치지 않을 것 같던 고집도 꺾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학생들의 노력이야말로 영원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대를 이어가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무엇보다 귀한 일을 용기로 해내 주셨다. 그 유대를 이어받아 가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지금은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서, 어쩌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무던한 위로가 되어 주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언제까지고 똑똑히 새겨질 수는 없지만, 그분들이 반박해 내었고 그분들의 희망으로 이어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그 토대 위에서 그 유대를 새 생명에게 이어줄 수 있다는 것. 지금도, 앞으로도. 그 학생들을 부르기에 영원이란 말은 더 이상 허황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억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처럼 기억하는 것, 그리고 이 마음 그대로 실천하며 언젠가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1960년의 그날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바꿔나가는 일, 그리고 이 세상을 소중하게 가꾸어 물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인 나 역시 지금 이 마음을 혹여나 잊더라도 흔적마저 아름답도록,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당신들의 진정한 가치를 바라봐 주지 않았더라도, 하늘을 바라보며 결국 지지않는 나무가 되어 주신, 그날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를 품은 그때의 학생분들과 시민분들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