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입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작고 뜨거운 불
다사중학교 2학년 최겸
아침에 일어나 잠을 깨울 겸 떠지지 않는 눈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전쟁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면에 눈이 떠져 뉴스 볼륨을 높였다. 뉴스 내용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니라 바로 미얀마에서 군사독재를 대항해 시민들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이였다. 나랑 상관없는 뉴스, ‘아~ 안됐네, 아이들이 불쌍하네’라고 단순한 생각만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아버지께서 “우리나라도 4·19혁명이 있었지”라며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우리도 미얀마처럼 독재정부가 있었었고 우리 스스로 그 독재정권을 물리쳤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4·19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더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4·19의 전초가 된 사건이 있었는데 2·28대구학생운동이였다.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 흥미를 가지고 검색해보니 2·28 대구학색운동은 1960년 이승만이 이끄는 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이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쟁이 벌이고 있을 때 대구의 학생들이 민주당의 선거유세를 계속 도와주었다. 정부가 선거에서 패배할까 두려워 대구의 학생들을 일요일에도 등교를 하게 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고 그로인해 학생들은 정권에 대해 분노를 하고 2월 28일에 북도청으로 가서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이승만 정권의 보복이 두려워 별다른 저항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정권에 분노하는 다 큰 어른들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학생들이 이 나라의 정치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 매우 엄청난 일이라 생각이 들어 가슴이 찌릿해졌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찾아봐도 학생들이 먼저 주도한 운동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니! 사회적인 목소리가 작은 나와 같은 학생들이 혁명을 이끈 것은 정말로 대단하고 멋진 일이 아닌가. 이러한 2·28 대구학생운동의 영향으로 3·15
마산의거가 있었고 여기에서 김주열 학생이 위하다가 경찰의 가혹한 진압으로 인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시신이 발견되어 전국민의 분노를 사게되어 4·19혁명이 일어났다. 작지만 뜨거운 학생운동으로 시작해 전국민의 혁명으로 확대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은 물러나게 되었다. 짝짝짝! 기립박수를 치고 싶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이렇게 성숙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고 정당한 투표방식으로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과 혁명에 참가한 국민들의 숭고한 희생과 용기, 그리고 함성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민주주의의 산물인 투표와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28 대구학생운동과 4·19혁명이 또 다른 멋진 점은 바로 평화적인 시위였다는 것이다. 유럽의 혁명을 보면 대부분은 무력적인 혁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28 대구학생운동과, 4·19 혁명은 엄청난 분노를 표출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절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분명히 화가 치밀어 오르고 눈물이 차오르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린 학생들도 국민들도 참지 못한 분노가 바로 부정부패 정권에 대한 분노였고 정권의 오만, 독재, 부패, 위선은 어린 학생들도, 다 큰 어른들도 분노하게 할 정도로 타락한 정권이였지만 평화스럽게 개혁을 성공했다. 타락한 정권을 몰아내고 직접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고 또 나아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만들기위해 가만히 있지않고 목소리를 낸 그때의 학생, 국민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그리고 혁명의 불씨를 만든 대구에 내가 숨쉬고 살고 있음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고,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하면 목숨 걸고 운동한 그 때 그 당시의 학생들을 위하여 감사와 내가 그 때 일에 대하여 잘 몰랐던 것에 대한 사과를 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우리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유와 투표는 이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