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입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4·19혁명의 씨가 된 대구광역시
경북공업고등학교 2학년 최선민
1960년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1960년 3월 15일에 실시한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선거에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했다. 당시 이승만을 대적할 유일한 방법인 조병옥(야당 대통령 후보)이 선거 한 달 앞두고 급서함으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사실상 확정 되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이다. 당시 고령자였던 이승만의 나이를 감안하면 대통령 부재시 권력승계자인 부통령이 누가 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강력한 야당 부통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었던 장면으로 인해 이기붕은 당선을 확신할 수 없었다. 대구는 야당 대통령 후보가 부재 상황 속에서 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역이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아 2월 28일 예정된 장면의 대구 수성천변 유세에 전국 이목이 집중 됐다.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대구 8개의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학생들은 학교별 긴급 회의를 열어 부당함을 지적하고 일요등교를 철회해 달라는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2월 27일 이대우(경북고학생부위원장)의 집에 대구고, 경북대부속고 등의 학생들이 모여 부당함을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고, 상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다음날 낮 12시 이대우(경북고학생부위원장) 등 학교 조회단에 올라 결의 문을 낭독했다. 이 결의문 낭독이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일제히 동조하고 박수치며 교사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후1시 경북고 학생들이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합류하며 시위대는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경북도청,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 당사, 경북도지사 관사를 돌며 자유다 정권을 비판했다. 당시 도지사는 ‘학생들은 공산당’이라며 비판했지만, 시민들은 학생들을 경찰로부터 숨겨주고 시위대에게 박수를 치며 동조했다. 또 수성청변 유세장서 시민들과 합세해 시위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이 날 시위 현장에서 220여명의 학생이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이로 인해 각 학교 교사들은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다. 이에 감동받은 대구지역 언론은 이 사건을 전국 각지로 보도함으로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이 민주운동을 살펴보면 대구에서 일어난 2·28민주운동이 씨가 되어 3·15마산의거가 싹을 트고 4·19혁명의 찬란한 꽃이 피게 되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단순히 4·19혁명만 알고 이것이 어디서, 왜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씀으로 4·19혁명의 시작점이 대구광역시였고 당시 시위대의 참여하신 분들이 다름 아닌 학생이란 것에 참 놀라웠고, “이분들 덕에 지금의 우리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명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