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동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달서중학교 3학년 하지수
1960년 2월 28일 역사에 남을 일이 대구에서 일어났다.

그때를 보면 이승만의 독재와 부패, 실정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국민들의 생활은 빈곤의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독재로 인해 언론도, 어른들 누구도 말 못 했던 그 시기 지금 나와 고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어린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가 민주화 운동을 펼친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당시 자유당 정부는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을 했고 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위한 선거운동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 수성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계획되었다. 이는 대구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어 자유당 정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 정부가 이성을 잃고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하였고 학교는 온갖 핑계로 일요 등교를 강행하였다. 바로 어린 학생들마저 정치도구로 희생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기 위해 하루 전날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인 이대우의 집에 보여 시위를 조직하고 결의문을 작성하였다고 이대우는 60년 2월 20일 낮 12시 55분, 조회단에 올라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 낭독은 격앙되어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오후 1시경 경북고생 800여 명이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하였으며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로 학교 담까지 넘어가면서 저녁 늦게까지 시위를 하였다. 이날 시위현장에서 약 22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체포됐고 교사들도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움츠렸던 언론들은 어린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 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 학생시위를 확산시켰다. 마침내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독재로 인해 빈곤의 극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던 시기에 어린 학생들이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힘을 합쳐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인 용기와, 이를 기반으로 하여 4·19혁명이라는 큰 결과까지 낳은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가 이 시기에 살아보지는 않았으나 어린 학생들까지 정치도구로 사용하고, 개표장에서는 사전투표, 대리투표, 피아노 표 등 부정적인 방법을 쓰면서까지 이 나라의 대표가 되려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