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동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다시 대구의 마음이 들불처럼 일어나야 할 때
대구 정화중학교 3학년 이수영
창밖의 무학산은 오늘도 담담하게 계절이 변하고 있다. 한껏 피어나던 꽃들도 다 지고 연두가 제법 초록이 되어, 겨울이면 보이던 산속 오솔길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하다. 시퍼렇게 추웠을 1960년 2월 남몰래 봄을 준비하던 무학산은 그 앞의(경북고) 순박한 고등학생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던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1960년 2월 전국의 이목이 집중된 수성 천변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것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 운동인 2·28 민주운동이 일어나게 된 불씨가 되고 말았다.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 경북고등학교 학생 800명은 경북도청으로 가두시위를 시작했고, 다른 학교들도 시위에 합류하거나 수성 천변으로 모여들었다. 대구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뒤덮인 것이다. 이 시위는 3·15 마산 의거를 거쳐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거친 들판의 마른 풀숲에 불이 붙듯 대구의 학생들에게서 시작된 민주주의 횃불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나는 화장이나 게임, 연예인에나 관심이 있는 또래 친구들을 생각하며, 어떻게 고등학생들이 불의에 맞서 제일 먼저 일어설 수 있는지 아버지께 여쭈어보았다. 아버지의 대답은 오랜 생각과 다르게 간단했다. “학생들이 가장 순수하고 정의로웠기 때문 아닐까?” 나는 잠시 뒤통수를 맞은 듯하였다. 우리는 어른이 빨리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의 흉내를 낸다.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는 발을 뺀다. 불의를 쉽게 보고 쉽게 저지른다. 나약한 또래에게 나쁘게 구는 아이들도 많다. 학생이 가장 정의롭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책임감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
다시 2020년 2월의 대구는 유례없는 고난과 역경을 마주하고 있다. 학원 옆 병원에서 대구의 첫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와 학원 앞 대로가 앰뷸런스로 꽉 찼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요란스러운 앰뷸런스 소리는 급박하고 두려운 감정이 들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래 학교를 못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대구가 ‘코로나 19’가 폭발하는 도시가 된 것이다. 연일 대구 소식이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고, 친척들에게 안부 전화가 쉼 없이 걸려 왔다. 엄마는 구할 수 없는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하루에도 6-7군데의 편의점과 슈퍼를 찾아다니셨다. 재난의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혼란도 잠시, 대구로 전국의 의료진들이 모여들었다. 대구시민들도 방역에 적극 협조했다. 누구의 강요나 명령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거리는 적막하게 보였지만, 사람들은 도시락을 만들어 의료진에게 전달하고 꽃을 보내기도 하였다. 서로를 응원하는 편지가 쓰여 졌으며, 마스크를 나누기도 하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기본적인 방역수칙을 조용히 지켜나갔다.
두 달 남짓 후, 5월 1일. 대구는 처음으로 확진자 0명을 기록했다. 역사책에서 유럽의 흑사병을 보듯, 마치 역사 속을 생생히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대구를 포함한 전국에서 확진자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우리는 3개월 만의 등교를 앞두고 있다. 우리의 학교생활이 이어질 수 있을지 불확실하지만 나는 대구의 학생들이 이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해 나가리라 믿는다.
우리의 마음속엔 상생과 통합의 ‘2·28 민주정신’이 흐르고 있으니까.
고난은 우리를 힘 합치게 하고, 단단하게 만든다.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우리의 DNA이다. 60년 전 독재정치 앞에서건, 60년 후 바이러스 앞에서건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막는 것이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라도 우리는 힘을 모아 그것을 극복할 것이다.
2020년 이 환난을 극복하는 우리의 조용한 함성을 집 앞의 무학산도 60년 전 그날처럼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