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동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당신은 대구의 학생들을 기억하는가
새본리중학교 3학년 양은수
당신은 어른들조차 외면하던 현실을 마주 보고 자유를 달라 외쳤던 대구의 학생들을 기억하는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그 해는 대선이 있던 해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으로 국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있었음에도 자유당은 부통령의 자리까지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통령 후보 중 한 명이 현직 부통령 장면이었기 때문에, 자유당은 내세운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확신할 수 없었다.

이에 자유당은 꼼수를 부린다. 높은 비율이 장면을 지지하는 대구의 학생들이 장면의 유세를 듣지 못하도록 2월 28일, 유세 날에 학교에 나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때문에 경북고를 비롯한 8개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학교를 나가야만 했다. 학교들은 영화 관람이니 토끼사냥을 한다며 일요일 등교를 강요했고, 심지어 경북고는 갑자기 중간고사를 앞당겨 치겠다고 한다.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의 부당함을 이야기하고 철회를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경북고, 대구고 등의 학교의 학생들은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를 중심으로 시위를 계획하게 된다.

2월 28일 당일,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는 학교 조회문에서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한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결의문 낭독 후, 학생들은 교사들과 부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을 뛰어넘어 학교를 나가 시위를 시작했다. 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경북도청,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등을 돌며 민주주의를 외쳤고, 학교를 빠져나오지 못한 경대사대부고와 대구상고의 학생들도 단식농성에 돌입하거나 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했다.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었다.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던 대구 학생들의 용기 있는 시위는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시위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3·15의거,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2·28민주운동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나라의 높은 사람들도, 시민들도 아닌 평범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었다. 나와 겨우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조금은 철없었을 그런 고등학생들. 아마 그들이 시위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많은 고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시위를 일으켜서 퇴학당할 수도 있고,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고, 주위에서 학생이니 시키는 대로 해라, 나서지 말라는 말을 수없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도출해 낸 결과는 시위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것을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실행함으로써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의 불씨를 붙였다.

2·28민주운동은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극을 준 촉매제라고 생각한다. 학생은 대놓고 말해서 모르기 때문에 무대포로 돌진한다. 그렇다고 또 마냥 무대포만은 아닌 것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생각보다 주위 상황에 대한 판단도 빠르다. 그런 학생들이기에 어른이 주춤할 때 나설 수 있었고, 이에 움추려 있던 사회를 깨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2·28민주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운동이라는 것 치고는 사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우리 아빠도 이미 반쯤은 까먹어가고 계시고, 한참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는 동생은 알지도 못하더라.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학생들의 용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