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동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아름다운 항의, 2·28 민주화 운동을 알아보다
경원고등학교 1학년 허서우
중학교 3학년 말 금요일 7교시에 상식 퀴즈 대회가 있었다. 그 중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옳은 것은?’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 문제를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마킹을 했다. 내가 고른 선지는 4·19혁명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교무실에서 채점을 하고 계시는 두 분의 역사 선생님께 자랑하고 싶어 “선생님! 최초의 민주화 운동을 고르라는 문제 4·19혁명 맞죠??”라고 물었다. 채점하고 계셨기 때문에 정답에 관한 내용을 말할 수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괜히 교무실에서 큰 소리로 물어봤던 기억이 났다. 그때, 두 분의 역사 선생님의 얼굴이 일제히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서 당황했던 경험이 떠오른다. 나중에 입상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최초의 민주화 운동은 2·28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역사 시험 100점을 놓친 적이 없던 나로서는 역사 상식을 문제를 틀린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2·28 민주화 운동 산문 쓰기를 통해 참회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꿨던 당시 고등학생들의 부단한 노력과 노고에 대해 열거하고 그를 통해 내가 느낀 점과 생각, 이 운동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인식 변화를 솔직하게 열거하고 서술하겠다. 2·28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자세한 정보를 찾기 위해 2·28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에 접속했다. 2·28 민주화 운동에 대한 10분짜리 영상을 보면서 2·28 민주화 운동의 주도자들이 경북고를 비롯한 대구의 여러 고등학교의 학생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여자 수는 약 8000여 명 고등학생이 참여를 했다. 사건의 시작은 1960년 2월 25일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2월 28일 일요일 등교하라는 전달 사항을 받게 된다. 학교에서 기말시험, 임시 시험 및 수업, 영화 관람, 토끼 사냥 등의 구실로 야당의 장면 후보 유세 운동에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학생들은 이런 부당한 행동에 1960년 2·28 민주화 운동을 벌인 것이었다. 학생들의 이러한 민주화 운동은 당시 집권하고 있던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항거였다. 이는 최악의 경우 사형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사실에 먹먹한 가슴 울림이 느껴졌다. 분명 학생들도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했을 텐데 이를 무릅쓰고 진정한 의미로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학생들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영상을 잠시 멈추고서 생각했다. “내가 살았더라면 나도 죽음을 무릅쓰고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건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저 상황에 있지 않던 내가 상상만 했을 뿐인데 그런 답변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우면서도 답변하기 쉽지 않은 답변에 주저 없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던 당시의 고등학생들이 대단해 보였다. 동영상에서 재생되던 그 열렬한 외침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아름다운 항의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이 영상을 보면서 이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프레더릭 더글러스라는 정치인이 떠올랐다. 이 사람 역시 부당함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다는 사실에서는 학생들과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말했다. “부당하게 지배받지 않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만 한다!” 난 이 말이 당시 학생들의 정치에 관한 관심을 대변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당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지금의 초, 중, 고 학생들처럼 정치에 무관심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면 2·2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없지만 정말로 그랬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독재 정권에 지배를 받을 수도 있을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생각이다. 또 경북고의 학생 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결의문 선언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모든 학생이 교문 밖을 뛰쳐나가 시위를 한 것이다. 학생들은 일제히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생의 인권을 옹호하라! 민주주의를 살리고 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 권력을 배제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경북고 외에도 대구고, 사대부고, 경북여고 학생들이 같이 참여하였다. 심지어 사대부고 학생들은 이러한 우직을 알아차린 학부모와 교사들에 의해 강당에 갇혀있었음에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탈출하여 어두운 밤에도 시위에 참여하였다. 경북여고 학생들도 시위에 제한을 받았으나 일부 학생들은 2·28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위의 사진은 장면 후보의 연설 사진이다. 주변의 경이로울 정도의 학생 수를 보면 없던 용기도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저렇게 친구들과 함께 불의에 저항한다는 것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러한 악순환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학생들의 책임 의식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2·28 민주화 운동으로 대구고 대부분 학생이 경찰에 끌려갔고 학생들은 신체적인 진압을 당해야만 했다. 경찰에 끌려간 학생들은 수백 명이 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의 진실 및 사건 은폐와 언론 조작 등으로 그렇게 이 사건이 마무리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서울-대전-수원, 청주-부산-마산 순으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건 분명히 처음으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용기를 내어 맞서 싸운 덕분에 일어난 결과이다. 이후 3·15 부정 선거가 시행되고 이승만 정권의 몰락 계기가 되는 4·19 혁명이 일어났다. 단언컨대 2·28 민주화 운동이 있지 않았다면 4·19 혁명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나는 2·28 민주화 운동을 조사하면서 많은 반성을 했다. 단순히 역사 점수를 높게 받기 위해서 교과서에 있는 내용만 암기하고 그 너머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2·28 민주 의거가 대구 시민만이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효시로서 전 국민에 의해서 정당하게 평가받고 추인되어야 마 때 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나는 대구 시민인데도 이 2·28 민주 의거를 기억하고 기리지 못했다. 또 중앙로에 있는 2·28 기념 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도 그 공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마땅히 알아야 하고 본받아야 하는 내용이 있다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모습처럼 주저 없이 역사책을 펼칠 것이다.

2·28 민주화 운동은 나한테 또 1가지 교훈을 주었다. 바로 그 교훈은 사람의 나이가 그 사람의 성숙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196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나이는 86살이었다. 유치원생도 하지 않을 부끄러운 행동을 다 큰 어른이 한 것이다. 오히려 나이가 적은 학생들이 행동은 후세까지 내려와 본받아야 할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 행동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는 최악의 정치로 역사에 남겨질 것이다. 2·28 민주 의거는 주도자들이 학생이었지만 시위 도중 경찰에 쫓기는 학생을 숨겨준 시민들, 학생들 행렬에 손뼉을 치는 사람들의 힘이 모여 이룬 결과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