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입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어느 남고생의 일기
대구명덕초등학교 6학년 김지현
1960년 2월 26일
학교에서 2월 28일 일요 등교 지시를 내렸다.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이 28일 수성 천변에서 하는 야당 후보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 것을 나는 안다. 민주주의를 배우는 학교와 그것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권력의 힘이 미치고, 정치도구화 시키다니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랴......
1960년 2월 27일
일기를 쓰는 지금은 늦은 밤이다. 조금 전까지 경북고등학교 이대우의 자취방에 있다 돌아왔다. 내일 1시, 시위를 하기로 했다. 경북고 3학년 휴학생 하청일이 결의문 초안을 작성하고, 모두가 힘을 모아 구호를 완성했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와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이다. 이것은 진짜로 우리가 바라고 바라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11명은 손을 잡고 결의했다. '첫째, 2월 28일 오후 1시를 기해 일제히 궐기하여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피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한다!', '둘째, 데모에 참가한 학생을 구속하거나 교사들에 대한 인사 조치가 있을 경우 데모를 계속할 것이며, 사태가 악화될 경우 백만 학도들에게 호소한다!'. 내일 데모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 지금 내 유일한 소원이다.
1960년 2월 28일
경북고를 시작으로 많은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 또한 밖으로 나갔다. 교사들의 저지로 인해 한꺼번에 많은 학생이 나오기는 무리였다. 우리는 무기를 쓰지 않는 평화적 시위를 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구둣발로 우리를 짓밟았다. 하지만 나는 경찰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들도 이승만 정부의 지시로 할 수 없이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진짜로 이런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지만, 이승만 정부를 원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니까... 시민들은 경찰에 쫓기는 우리들을 숨겨주었다. 다행히 나는 잘 도망쳤지만, 많은 친구들이 구속되었다. 그 속에는 남학생들 뿐 만 아니라 여학생들까지도 있었다. 결의한 것처럼 내일 시위를 계속할 것이다.
1960년 2월 29일
대구상업고등학교에서 친구들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시도했다. 학생들은 학교 담장을 허물고 친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행진을 시도하려 했으나, 제지로 인해 경찰과 대치했다.
상부에서는 시위가 커질 것을 우려하여 친구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믿지 않자 경찰들은 대표 학생들과 동행하여 구속된 학생이 없음을 확인시켜주었다. 200명이 넘는 친구들이 모두 석방되어 참 다행이다.
1960년 3월 1일
3.1절이다. 3.1 운동처럼 다 같이 들고일어났던 우리의 시위가 생각났다. 그러나 아직도 이승만과 자유당은 독재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의 노력이 친구들만 희생시킨 헛된 것이었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앞으로 나라가 어떻게 될지, 이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걱정이 먼저 앞선다. 그래도 대구 매일신문사에서 우리의 외침을 알려주었고, 많은 제지가 없다. 참으로 다행이다.
1960년 3월 8일
처음으로 우리의 시위에 대한 응답이 들려왔다. 대전에서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 또한 우리처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 자유........ 이것들이 이토록 힘든 것인지도 의문이다. 만약 이것들이 이토록 힘든 것이면 차라리 없는 것이 맞는 것 같다.
1960년 3월 15일
3월 8일에 이어 오늘,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오늘은 투표 당일 이지만, 마산에서 조작된 투표함을 발견한 것이다. 결국 마산에서는 투표 포기 선언을 하고, 시위를 하러 나섰다. 그런데, 마산에서는 하루 만에 12명이 목숨을 잃었고 14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민을 지키는 경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이는 시민을 지키는 경찰이 아닌 시민을 죽이는 경찰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60년 4월 11일
한참 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아니 쓰고 싶지 않았다. 2월 28일, 3월 8일, 3월 15일 시위에 대한 응답이 없어 속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3월 15일 시위 후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업고등학교 김주열의 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상태로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라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마산 2차 시위가 시작되었다. 김주열..... 내 친구라면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실 우리는 이미 동지인 셈이다. 이승만 정부의 독재정치를 막기 위해 힘쓰는 동지 말이다. 마산에서 2차 시위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1960년 4월 13일
마산 2차 시위는 사흘 동안 계속되어 오늘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마산상고와 성지 여자중, 고등학생 800여 명이 시가행진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마산에 있었다면 함께 시위를 했을 텐데 정말 아쉽다. 이승만 정부는 이승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부른다. 그럼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내가 빨갱이면 우리가 빨갱이고, 우리가 빨갱이면 이 나라 전체가 빨갱이겠네!" 하,,,,, 이젠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막을 내리기를 기원한다.
1960년 4월 18일
드! 디! 어! 서울에서도 응답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했다. 일기에 이렇게만 쓰면 아주 기쁠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는 학생들을 이승만의 부하들인 깡패들이 쇠 파이프로 마구 때린 것이다. 누구 하나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소리 한번 못 질러보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나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1960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자유를 향한 처절한 외침이 시작되었다. 오늘 오전 3만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경찰의 발포로 학생들 중 상자가 발생하자 오후에는 10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 서울 도심은 마비되기에 이르렀고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오늘 하루, 서울에서만 약 130명의 사망자와 1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960년 4월 25일
4월 19일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며칠간 전국의 시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고 오늘은 대학교수 300여 명이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였다. 대학교수들 또한 우리와 같은 뜻이고 같은 생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내 몸에는 힘이 저절로 생기는 것 같다.
1960년 4월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습니다." 이승만의 한 마디에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출발점에는 나와 동지들이 있었음이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우리의 운동은 4월 19일 전국으로 퍼져 국민과 함께, 국민의 힘으로 부정하고 부패한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무너뜨렸다.
'정의는 승리한다!!!'
2020년 2월 28일
옛날 일기장을 펴보고는 또 이렇게 펜을 든다. 앞에서부터 쭉 읽어보니 이 일기장은 민주주의 일기장이다. 이승만 하야 후에도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치가 있었지만, 잘 헤쳐 나왔다. 오늘은 2.28 민주화 운동 60주년이다. 2.28 민주화운동은 58주년인 2018년에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너무도 늦게 지정된 것 같아 아쉽기는 하나, 이제라도 지정되어 다행이다. 나는 이제 고등학생이 아닌 할아버지가 되었다. 가끔 옛날 일을 떠올리면 항상 같은 생각으로 끝맺는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