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동상(산문)
2.28 대구학생 민주운동과 4.19 혁명에 대해
구민준
2.28 대구학생 민주운동이란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경 대구 경북고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가 운동장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읽은 뒤 8백여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북고 학생들의 2·28시위는 새로운 학생운동의 첫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이래 학도호국단으로 묶여 권력이 요구하는 관제 시위를 벌였다. 1950년대 내내 북진멸공·반공방일 시위에 동원되었고, 고위 관료가 행차를 해도 연도에 늘어서서 박수를 쳐야 했다. 그런 학생들이 현실을 비판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자생적 시위였고 4.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근세사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이다. 특히 이 나라 민주화를 앞당긴 2.28민주의거가 당시고교 2학년인 어린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4.19혁명이란 이승만 치하에 갖은 부정부패와 공무원의 무능과 경제는 토탄에 빠져들었고 3월15일 부정선거로 인한 재집권야욕을 민주학생들의 의거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를 정치깡패를 동원 폭력사태를 유발시켜 계엄령으로 제압할 계획이었다. 결과로는 이승만은 하야 망명 정부 전복 과도정부 수립한 혁명완성이 되었다. 의의로는 4.19 혁명은 민주 학생에 의거 주도되어 전 국민으로 확산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에 의하여 정권이 교체된 역사의 가장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큰 의미를 갖고 있는 혁명을 정치가들의 분열과 야합으로 국민은 더 불안이 가중되어 일 년 후인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비극이 있습니다. 사회적 영향으로는 민주시민이 이루어낸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의 시민혁명이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민주적 제도에 점진적으로 정착되었으며 이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안보투쟁이 일어났고 대만의 민주화 시위 등에 영향을 미쳤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민주 항쟁 등은 이 혁명의 정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2.28 학생 민주운동을 보고 느낀 점은 학생들과 국민들이 자체적으로 나서서 정치적인 문제점을 비판하며 시위에 나섰다는 용기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내가 이 시기에 살고 있었다면 나는 시위에 나섰을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이 다치거나 위험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앞에 나서서 맞선다는 것은 정말 담대한 사람들이다. 학생들이면 아직 다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겁도 많고 어른들에 비해 덜 성숙한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를 비판해 올바른 사회로 바꾸자는 노력이 멋있고 본 받고 싶다.
4.19 혁명을 보고 느낀 점은 국민들이 선거 등에 부정성을 알고 그것이 잘못됨을
알고 고치고자 정부에 시위를 열며 비판했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내게 피해가 올 것을 알면서도 부정함을 고치고자 노력했다는 용기 등이 정말 멋있고 존경스럽다. 예전 사람들은 이런 정부의 부정성 등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요즘에도 많이 힘든 것이다. 이런 예전 국민들이 이렇게 노력을 해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가 만들어진 것 같다. 정말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을 항상 기억하며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