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은상(산문)
작지만 작지 않은 불씨
새본리중학교 2학년 배준서
지난 겨울방학에 나는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동성로로 향했다. 가까이에 살았던 친구였지만 그 친구가 이사를 하고 전학을 가면서부터 가끔씩 만나는 우리의 약속 장소는 둘의 중간지점인 시내, 즉 동성로가 되었다. 버스로 여러 정류장을 지나 내가 내린 곳은 ‘2.28기념 중앙공원’…….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차가 막히는 시내 한복판에 공원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고, 버스정류장 이름이기도해서 나는 ‘2.28기념 중앙공원’을 친근하게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2.28이 3.1절처럼 날짜라는 것은 짐작이 갔지만, ‘2.28이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이기에 기념공원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에게 2.28은 그냥 익숙한 공원,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는 장소에 불과했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유명강사가 ‘4.19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혁명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 강사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부정선거’와 그 이후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오른 장면에서는 나도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지고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바로 2월 28일에 대구에서 학생시위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2.28민주운동’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1960년 3월 15일에 예정되어있던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에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야당 후보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렸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결의문을 작성하고 경북고생 800명을 시작으로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라고 외치며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들의 심한 욕설과 폭행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이어나갔고,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박수치며 동조했다.
‘2.28민주운동’은 독재와 부정이라는 어둠 속에 갇힌 시민들에게 하나의 불씨와도 같았다. 시작은 작은 불씨였으나 그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져나가 3.15마산의거, 4.19혁명으로 이어지고 결국 4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작은 불씨들이 모여 큰 어둠을 걷어낸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된 ‘2.28민주운동’이 대구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민주주의 실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대구시민으로서 자랑스러움도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알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무관심했던 나 자신에 대해 반성도 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조금씩 발전해 왔다. 그리고 그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중에 학생들의 힘이 이렇게나 컸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이면 나보다 불과 몇 살밖에 많지 않는데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던 고등학생이었다면 그렇게 독재와 불의에 저항해서 용기를 내어 떨쳐 일어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그들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당연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어느 순간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일 뿐…….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던 지금의 민주주의가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했고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고,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약하고 작지만 그 약하고 작은 힘들이 모여 큰 줄기를 이루고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이제 ‘2.28기념 중앙공원’은 나에게 그냥 약속장소가 아니다. 1960년 그 날을 치열하게 살았던 젊은 학생들의 마음을 떠올리는 곳, 나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보탬이 되어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