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은상(산문)
역사를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
대구동부고등학교 2학년 김혜리
1960년 2월 28일에 일어난 2.28민주화운동은 대구의 8백여 학생들이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승만과 여당인 자유당은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을 통해 독점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대통령 후보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이른바 3.15부정선거로 일컬어지는 부정선거를 일으켰습니다. 자유당의 이승만과 민주당의 조병옥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조병옥이 선거를 앞두고 심장마비로 급사함에 따라 이승만이 단독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기붕의 당선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현직부통령인 ‘장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면’이 대구 수성천변에서 유세를 할 것이라는 예고에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대구는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하는 지역으로 알려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 정권은 학생 · 공무원 · 노동자 · 시민 등이 장면의 유세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부당한 지시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구의 공립 고등학교인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여고, 대구상고의 학생들이 유세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조기 중간고사, 영화관람, 토끼사냥, 송별회, 임시수업 등을 핑계로 ‘일요일에도 등교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그 당시 기성세대들은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로 비판과 저항정신을 잃고 현실순응적인 '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시대의 경찰은 일제강점기의 순사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국민 생활에 간섭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가히 3권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유행어가 나돌만큼 국민들은 침묵이 강요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허울뿐이고 경찰국가체제로 국가가 운영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북고ㆍ대구고ㆍ경북사대부고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이 25일 밤부터 비밀회동을 갖고, 일요일에 등교하여 항의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권이 전국의 학생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묶기 위해 조직된 것입니다. 이러한 학도호국단의 간부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붕괴 전조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 같습니다. 대구의 학생들은 부당함을 지적하고 지시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1960년 2월 28일, 부당한 지시에 반발한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대구 경북고의 이대우 학생부위원장 등은 학교 조회단에 올라가 전날 작성한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히 밝힐 결의문을 외쳤습니다.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고르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린 학도(⋯). 이 민족애의, 조국애의 피가 끓는 학도의 외침을 들어주려는가? 우리는 끝까지 이번 처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싸우련다.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라고 외쳤습니다. 또한 대구고등학생 200여 명도 오후 2시경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시위를 벌이고, 경북여고생 100여 명도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경북사대부고생들은 교사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눈치 채고 학생들을 강당에 가두어서 학생들이 오후 늦게 시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대구여자고등학교, 대구농업고등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8백여 명의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대구,경북 지역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2.28민주운동>입니다.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온 학생들은 30여 년간 자행된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 독재를 규탄하는 한편 민족문제, 민중 생존 문제에 대해 발언하며 시위를 이어나갔습니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오르게 된 것입니다. 3.15부정선거를 앞두고 타 지역으로 학생시위가 번져나갔습니다. 2월 29일에는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상고에서 학생들이, 3월 5일에는 서울지역의 학생들이 장면 부통령 후보가 서울운동장에서 유세를 한 다음 퍼레이드를 할 때 학생 1천명여 명이 “부정선거 배격하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뒤를 따랐습니다. 3월 8일에는 민주당 강연회에 가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학생들이 장면 후보 강연회가 열리는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합니다. 당시 무장경관이 곤봉으로 학생들을 때리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이 시위로 학생 간부들과 50여 명이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3월 10일에는 수원농고와 충주고 학생들이, 3월 12일에는 부산 학생들, 3월 13일에는 서울시청과 명동 앞에서 모여 학생시위를 하게 됩니다. 특히나 3.15 정,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고교생들의 시위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3월 14일 자 어느 석간신문에서는 도처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민주당 참관인이 부상을 당했다는 내용의 기사도 실렸습니다.
이처럼 학생시위가 펼쳐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 3월 15일에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3.15 부정선거라고 합니다. 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부정과 폭력으로써 재집권을 시도하다가 4·19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야기한 사건입니다. 이승만은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유권자의 40% 정도를 자유당에 미리 투표하게 하였고 이기붕에 미리 찍어 놓은 표가 있는 투표함으로 바꿔치기를 하였습니다. 또한 3인조 또는 5인조로 팀을 편성하여 조장이 누구를 찍었는지 미리 확인하고 투표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부정선거로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에 찬성한 표가 100% 나오는 일도 있었으며, 결국 이승만과 이기붕이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부정선거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에 나섰습니다. 이 사건을 3.15마산의거 라고 합니다. 경찰들은 항의하는 마산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발포를 하였습니다. 당시 시민극장 근처에 있었던 오성원이라는 청년은 경찰이 발포한 M1 카빈 소총의 총탄이 오른쪽 가슴을 관통하여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그 이외에도 최소 8명의 사망자와 72명의 부상자들이 나타나는 가운데 시위 당시에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체로 마산 중앙 부두에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시체를 본 마산 시민들은 또다시 크게 분노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열었습니다. 마산에서 촉발된 3.15의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으로 치닫게 됩니다.
당시 이승만 독재 정권은 무력으로 시민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지만,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 군중들의 분노 앞에 결국 하야를 선언하며 정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를 4.19혁명이라 합니다. 이처럼 2.28 민주운동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첫 승리인 4.19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저는 2.28 민주운동이 4.19혁명에 빗대기엔 많은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저 학생들이 뛰쳐나와 강제 등교 반대 운동을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세상을 바꾸겠다고 뛰어나온 것도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다치거나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학생운동이나 만세운동에 비해 뭔가 초라해보이고 혁명이라 하기엔 뭔가 부족함이 많아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혁명은 작은 불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인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일어날 때에도 시민들은 그 결과가 그렇게 커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시작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자동차가 처음 움직일 때 많은 에너지가 드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2.28 민주운동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의 4.19혁명과 5.18민주운동에 이르기까지. 남들이 시작해주기를 바라며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마침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찾고 부여하며 그것을 글로 작성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글짓기 활동을 통해 배운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