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입선(산문)
목숨을 걸고 시위한 용감한 대구의 학생들
대구비봉초등학교 6학년 김민경
학교에서 사회를 배우는데 “2.28민주운동”이란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께 2.28민주운동이 뭐냐고 묻자 선생님께서 “너희들이 한 번 찾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처음에는 그냥 어른들이 시위한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2.28대구학생의거”라고 학생들이 시위를 했다고 나와 있었다. 이 글을 찾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학생들이 시위를 했다고? 학생들이 시위를 어떻게 했지?”였다. 이렇게 처음에는 못 믿었지만 자료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정말 학생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2.28민주운동이란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시작한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자 3.15의거,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2.28민주운동의 배경은 정치가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을, 부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일어난 일이다. 이승만 정권은 학생, 공무원, 노동자, 시민 등이 유세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부당한 지시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대구의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여고, 대구상고학생들에게 선거 유세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이상한 핑계들로 “일요일에도 등교를 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1960년 2월 28일 부당한 지시에 반발한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 첫날에는 경북고와 대구고교 학생들이, 2월 29일은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대구상고 학생들이 데모에 동참했다. 경북고, 사대부고는 학생들을 강당에 가두고, 경북여고는 학생들이 나가지 못하게 교문을 걸어 잠그는 행위를 했지만 학생들이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대구지역 언론은 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대구학생의거’ 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언론이 퍼지고 다른 지역의 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하여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8일에는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시위를 하다가 무장 경관이 곤봉으로 학생들을 때리며 난투극이 벌어졌고, 학생 간부들과 50여명이 연행되었다. 이 사건은 3.15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 정권의 하야로 끝이 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대구 학생들이 용감하게 맞서 싸운 2.28민주학생의거이다. 나는 정말 2.28민주운동에 대해 찾아보는 내내 계속 들었던 생각은 “나도 이런 용기를 가지고 싶다.”였다. 정말 나라를 위해 자기가 위험해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맞서 싸우는 그런 용기를 가지고 싶다. 그리고 대구에서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대구 학생들을 도와 함께 시위를 한 전국의 학생들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전국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해서 이 시위가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교문을 걸어 잠그고 강당에 가두어도 시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뛰쳐나가는 그 의지를 너무 본받고 싶다. 그리고 조금 충격적이었던 것은 무장경관이 학생들을 때리며 난투극을 한 것이 충격적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옛날에 여러 가지 시위를 할 때 경찰이나 군인들이 시민들을 때렸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광주 시위 때 군인들이 시민들을 때리고 간혹 시민을 죽이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군인들과 경찰들이 왜 그랬는지도 알고 싶어졌었다.
또 이번에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되고 나랑 하는 약속이 생겼다.
만약 우리나라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옛날 대구 학생들처럼 시위를 할 것이다. 그런 행동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타당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만약 우리가 시위를 하지 않는다면 옛날에 대구 학생 분들이 열심히 시위를 하셨던 희생이 헛수고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2.28민주운동을 계기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