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입선(산문)
화랑의 얼, 달구벌의 정신, 한국의 미래
대구고등학교 2학년 박무근
올해는 백 년의 시간이 흐른 한국 역사를 학습하기에 좋은 년도입니다. 백년전 3월 1일에는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한국의 독립 의사를 전 세계에 알리는 날이었고, 4월 11일에는 한국의 광복을 희망하는 뜻을 모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한 날이었습니다. 정당한 것을 위하여 함께 싸우고, 후손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해주기 위해서 싸운 그 날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59년 전 2월의 마지막 날도, 달구벌의 학생들이 함께 모여 후배들에게 좋은 사회를 물려주고 개혁하기 위해 한데 모였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에서는 단독으로 총선거를 시행합니다. 이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7월 20일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한국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1987년 9차 개정 헌법 이전까지는 5년 단임제가 아닌 4년 단임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도에 자신의 임기를 끝마쳐야 함에도 ‘발췌개헌’을 통해서 재집권하고, 심지어 1954년에는 대한민국사를 배운 학생들이라면 잘 알 수 있는 4사 5입(사사오입) 개헌을 통하여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1960년 4월 26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합니다. ‘관직이나 정계에서 물러남’을 뜻하는 ‘하야’라는 단어는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에 실패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60년의 한국은 1950년대부터 이어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권으로 인해 국민의 삶이 점차 피폐해지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 속 이승만 대통령은 3월 15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대통령,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합니다. 그 이유는 이승만의 나이가 당시 86세로 고령이었고, 따라서 그가 만약에라도 생을 마감한다면 부통령 이기붕이 당선되는 것이 자유당의 정권을 안정적으로 이어 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반장선거를 하나 해도 떨리듯이, 당시 강력한 야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의 인기로 이기붕의 당선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대구는 1956년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장면의 탄탄한 지지층이 되어 줄 수 있었고, 따라서 1960년대의 대구에는 전국 각지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 2·28 민주화 운동은 장면의 선거유세현장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여고, 대구상고)에 일요일에도 등교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경북고 이대우 학생부 위원장이 주가 되어 2월 27일 오후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등의 학생들이 함께 일요 등교에 항의하기 위한 결의문을 작성했습니다. 다음날,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가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이다.”
결의문을 낭독하는 것은 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에 맞서 싸울 힘이 되어 주었고, 이승만의 독재에 잠시 주춤하기도 했었던 대구지역의 언론사들이 달구벌 학도들의 외침에 다시 일어나 2·28 대구학생의거를 보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곧 전국지역으로 학생 시위의 도화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고,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킬 수 있도록 3·15 마산 의거와 4·19 혁명과 같은 한국사에 길이 남을 민주화 운동의 발판이 돼주었습니다.
2·28 민주화 운동은 단지 일요일에 강제 등교를 지시함에 불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발적인 정치행사 참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로서 막은 정권의 부조리함을 바로잡기 위해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선 운동입니다. 자그마한 지역에서 퍼져나간 외침은 곧 전국에서 대한민국 사회를 건강하게 할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대에 이어져 현재 대구고를 재학 중인 박무근이란 학생에게도 한국 사회를 바로잡고자 했던 한국민족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2·28 민주화 운동 글짓기 대회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