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입선(산문)
4.19 혁명의 시발점, 2.28 민주화운동
박민준
내가 2.2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역사 시험 때이다. 그 시험에 배점 1점으로 서술형으로 나온 ‘4.19혁명의 시발점이 된 대구에서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운동은 무엇일까?’라는 문제에 나는 2.29 민주화운동이라고 답을 적었고, 선생님께서는 어이 없어하시며 나를 꾸중하셨고, 굉장히 부끄러웠던 나는 2.28 민주화 운동에 대해 더 궁금하게 되었고 여러 자료를 조사해 보았다. 이 글쓰기 대회를 계기로 내가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

2.28 민주화 운동의 인터넷 홈페이지인 http://228.or.kr 에는 2.28 민주화 운동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운동은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패와 무능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저질러진 불의와 부정에 분노해 대구지역 8개 고등학교(경북고, 사대부고, 대구고, 대구상고, 대구농고, 대구공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발생한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며, 2018년 2월 6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1960년의 한국은 참담했다. 십 수년째 계속된 이승만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끝까지 몰아갔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비민주적 개헌과정을 통해 독재 권력을 강화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했다. 이승만을 대적할 유일한 대안으로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앞둔 2월 15일 급서함으로써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이제 당시 86세 고령이었던 이승만 나이를 감안하면 대통령 유고시 권력승계자인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는 것이 자유당 정권 최대의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강력한 야당 부통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었던 장면으로 인해 자유당의 이기붕은 당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대구는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따라서 2월 28일 예정된 장면의 대구 수성천변 유세에는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2·28민주운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장면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학생들은 일요등교 방침이 알려진 직후부터 각 학교별 긴급회의 등을 열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학교에 일요등교를 철회해 줄 것으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경북고 이대우 학생부위원장의 집에 경북고, 대구고, 사대부고 등의 학생들이 모여 부당한 일요등교 항의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고 상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28일 오후 1시경 경북고생 800여 명이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했으며 교문돌파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고 학생들도 마침내 시위를 시작했다. 대구는 곧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시위대는 중앙통 매일신문사를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을 규탄했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동조했다. 곧 바로 시위에 합류할 수 없었던 사대부고와 대구상고 등의 학생들은 교내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거나 학교 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수성천변 유세장으로 간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등의 학생들도 시민들과 합세해 저녁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이 날 시위현장에서 약 220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됐고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각 학교의 교사들도 추궁을 받았다. 이승만 독재에 움츠렸던 대구지역 언론은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대구학생의거’를 보도함으로써 타 지역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28의 함성은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2·28은 단순히 일요일 강제 등교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삶이 무너진 시대적 상황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과 3·15선거를 앞두고 자행된 야당 부통령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내려진 일요일 등교라는 정권의 음모를 간파한 학생들의 분노 때문이었다. 2·28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뿌리로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민주주의 실천 운동이었다. 이후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던 2·28은 2018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나는 이런 2.2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용기있는 학생들에게 크게 감동을 받았고, 2·28민주운동의 정신은 우리 사회의 시대적 요청인 상생·통합의 선진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정신적 자산으로 계승·발전 되어야 한다고 깊이 생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