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입선(산문)
1960
도건오
한국전쟁이 끝난 대한민국, 이 나라의 중심엔 이승만이 있었다. 1948년부터 약 12년 간 혼자서 1대 2대 3대 대통령을 역임하던 이승만은 민주화에 눈을 뜨기 시작한 국민들에게 독재자일 뿐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2대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1952년 전쟁 피난 중 발췌개헌을 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1954년에는 또 다시 3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하여 사사오입 개헌을 하였다.
전후 이승만은 나라가 성장하려면 지식 계층이 필요하다며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국민들도 공부를 하면 신분이 상승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너도 나도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 심하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교육기관에서는 국민들에게 반공 교육과 더불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교육도 함께 실행하였다. 하지만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와 그들이 겪고 있는 시대는 사뭇 달랐다. 분명 당시 교육기관에서는 [자유민주주의 또는 정치적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정치원리 및 공화제 입헌 정부형태이다. 권력의 분리와 감시를 지향하는 공화제 틀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을 세우고 민주적 절차 아래 다수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국민주권주의와 입헌주의의 틀 내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체제이다.] (출처:위키백과) 라며 자유주의를 가르쳤을 것이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각종 부정부패를 저질러 가며 역임해가던 상황을 지켜본 국민들은 이질적인 현실 때문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언론사들은 이승만의 독재 체제를 비판하며 국민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그러던 와중, 1960년 3월 15일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게 된다. 1960년 3월 15일은 정부통령선거(정부통령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권한을 섞은 직위였다.)가 치러질 계획이었는데 이전 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속한 여당인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에게 패하여 이승만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이승만은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는 무조건 이기붕을 부통령자리에 앉히려 온갖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
1960년 3월 15일 선거를 위해 2월 27일(당시 토요일)에는 자유당 2월 28일(당시 일요일)에 대구에서 민주당 후보인 장면의 선거 유세가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승만 정부는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고 했다. 2월 10일 대구시내 각 기관장과 학교장을 소집하여 27일에 있을 자유당 유세에는 ‘다수가 유세장에 참석할 수 있도록 낮 12시까지 업무와 수업을 모두 끝낼 것, 또한 자유당 유세장에는 가구당 1명을 동반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와 다음날 있을 민주당 유세에 대해서는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 행사를 계속할 것’이라는 한 번 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를 받은 학교장들이 실제 2월 28일 일요일에 등교를 명령하자 이에 불의를 참지 못하였던 대구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28일 낮 12시 50분, 경북고 학생 부위원장인 이대우 학생이 학교 운동장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읽고 경북고생 약 800명이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라고 외치며 대구 시내 중심가로 나가 시위를 벌였다. 경북고뿐만 아니라, 대구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상고의 학생들도 함께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에 퍼트린 파급력은 대단했다. 그들의 시위는 이승만 정부에 탄압받고 있던 언론에 힘을 주어 ‘2.28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학생이 아닌 시민들에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갖게 했으며, 결국 그 어린 학생들의 모임은 3.15 마산의거, 4.19 혁명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최초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써내려간 것이었다.
학생들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승만 정권의 부정을 간파했고 스스로 민주주의를 원했으며, 무엇보다도 불의에 맞설 용기가 있었다. 그들의 용기는 결국 4.19혁명까지 이어져 이승만이 스스로 하야하게 만들었으며 스스로 민주주의를 이끌어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나와 같은 나이대의 학생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통해 한 번 더 되뇌게 되었다. 불의에 대항하는 삶의 태도를. 살아감에 있어서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의’와 ‘불의’가 우리를 고뇌하게 만든다. 물론 이상적인 삶의 태도는 항상 ‘정의’를 따르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우리가 정의와 불의의 갈림길에 놓여 있을 때 마냥 정의를 택하기에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불의를 택하고 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승만도 불의를 택한 것이다. 그렇게 불의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지배한 세상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사람들은 그 불의 시대 속에서 순응하기도 무릎 꿇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2.28 대구 학생들과 같이 정의에 대한 신념을 지키려는 자들이 있었고 그 결과 오늘날의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 즉, 결국은 정의가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만화영화에서 보던 ‘정의는 승리한다.’가 단순히 어린이 만화 속 캐릭터가 내뱉는 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가슴속에 ‘정의’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고 신념을 지키며 살아왔다. 비록 아직 많은 사람들을 만나진 못했지만 내가 만나거나 본 사람들 속에도 불의를 저지르거나 불의에 눈감는 무책임한 행동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에게 2.28 민주화운동에서의 학생들의 행동을 알려주고 ‘정의는 승리한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졌다.
2.28 민주화운동의 학생들은 나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해주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어릴 적부터 ‘정의’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선택의 순간순간마다 매번 신중히 생각하고 신념에 맞게 살았다. 하지만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그 선택들이 마냥 ‘정의로운 것이었을까?’라는 의문과 ‘단지 내가 편하기 위해 불의를 정의로 스스로 착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굳게 지켜왔다고 생각했던 정의라는 신념이 조금씩 흔들렸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불의에 응하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만 넘어가면 편해’라는 나 자신과의 협상과 불의에 응한 이들의 따가운 눈초리에 못이긴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순간들이 내 신념 자체를 깨뜨릴 만한 불의는 아니었더라도 지금 생각해보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창피해지는 것 같다. 맞는 것을 맞다고 하지 못하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지 못한 과거의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나타날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나는 나의 태도를 완고히 하기로 결심했다. 불의에 무릎을 꿇을 순 있지만 정의를 포기하진 않겠다고 이 글을 통해 다짐한다. 2.28의 학생들 중 일부는 분명 나와 같이 과거에 불의에 응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들의 ‘정의’라는 신념을 지켰고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은 나와 같이 다짐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불의로 인해 신념을 잃지 말자고.
옛날부터 이런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난세 속에서 영웅이 나타난다.’ 하지만 모두가 1960년 2월 28일의 대구 학생들처럼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하루하루 지니고 살아 난세를 미리 막는 영웅이 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