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그날의 우리가 오늘의 우리에게
다사중학교 3학년 조미진
“삐비빅... 삐비빅...” 시끄러운 알람소리에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책상에 놓여있는 달력에는 2월 달 페이지가 놓여있었고 28일, 오늘이라는 빨간색으로 표시된 날짜 위에 ‘학교 가는 날’이라고 표시해둔 나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니 아침밥과 그것을 차려주신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다 먹고 교복을 챙겨 입은 내 모습이 일요일이었지만 여느 평일 때와 다름없는 하루일 것 같았다. 나는 교문을 지나 교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였다. 반 아이들이 모두 수군거리고 있기에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자유당 정권이 우리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학교로 불러낸 것 이라는 말이었다. 화가 나고 참으로 어이없다는 주변반응들이 그 상황의 분위기를 휘어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었던 나였지만 어느새 분위기를 탔었는지 내 안에 들끓고 있던 무언가를 느꼈다. 종이 치고 들어오시는 선생님의 발소리에 그 무언가는 금방 관심 밖으로 떠나갔다. 선생님께서는 갑자기 임시시험을 친다고 하셨다. 우리 반 아이들의 궁시렁대는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교탁을 두드리시는 선생님의 각목 소리에 다시 잠잠해졌지만 다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험지를 뒤로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1교시를 마쳤다.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아이들이 몰려 있길래 나도 친구에게 손목 잡혀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옆 동네 경북고에서 이진 자유당 정권이 우리를 장난감삼아 정치질을 하고 있다며 학생회장의 주둔 하에 집회를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꽤 놀랐었지만 경북고 아이들의 의견에 찬성한다는 대다수의 아이들에 의해 나의 놀란 마음이 정의감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한 아이가 우리도 동참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라는 굳은 표정으로 우리는 암묵적 약속을 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중심으로 모두 학교 밖으로 나가려는 채를 했다. 각목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선생님들이 우리를 말리려 소리를 지르며 모두 돌아가라 하였지만 우리는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게 교문 밖을 나오니 우리와 다른 교복을 입은 많은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우리는 중앙통을 거쳐 경북 도청, 대구 시청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다. 우리가 내뱉었던 모든 한마디 한마디와 소리쳤던 한명 한명의 목소리는 흘렸던 눈물만큼이나 뜨거웠다. 거리에는 경찰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반 아이 중 한명이 그 사람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끌려간 사람은 그 아이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아이의 표정과 마음, 그리고 심정을 다를 많은 아이들의 표정과 몸부림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나라고 위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나의 신경을 곧게 세우고 있던 찰나에, 한 경찰이 나와 나의 친구를 향해 다가오는 듯한 눈치를 느꼈다. 나는 나의 친구의 소목을 잡고 좁고 어둡게 보였던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좁은 골목에서 나던 쾌쾌한 냄새들을 제대로 느낄 세도 없이 죽도록 뛰었다. 골목 끝이 보이자 아차 싶었지만 곧 나와 눈이 맞추쳤던 아주머니가 숨겨줄테니 들어오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와 내 친구의 감사 인사 또한 눈빛으로 아주머니께 보내드렸고 그렇게 우리는 누추하게 보였던 어느 낡은 가정집 부엌 한 켠에 숨어있었다. 곧 무섭게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났고 다행이도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소리는 점차 사라져갔다.
나는 두려움과 긴장감에 두눈을 아주 세게 감고 있던 터라 눈을 뜨니 눈앞이 아른아른거렸다. 내 친구 역시 두 눈을 꼭 감고 있길래 이제 괜찮다며 깨워주기 위해 손을 흔들어주었는데 그 손이 꽤나 축축했다. 친구는 눈을 뜨자마자 한숨을 크게 두어 번 내쉬더니 젖어있던 손을 바지에 대충 비벼냈다. 우리는 일어날 힘도 없다는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부엌에는 가마솥이 끓는 소리만 귀를 파고들 뿐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도 잠잠해진 상황을 느끼셨는지 우리가 있던 곳으로 들어오셨다. 그제서야 정신을 좀 차린 우리는 아주머니가 안내하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냉기가 돌았던 부엌과는 다르게 따뜻한 방바닥이었고, 중앙에는 둥글고 낮은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었다. 곧 아주머니께서는 끓고 있던 가마솥에서 죽을 덜어 우리에게 두 그릇을 내주셨고 두꺼운 이불 또한 몸에 감싸라며 건네주셨다.
나는 딱히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허겁지겁 먹고 있는 친구 녀석의 모습을 보니 나도 나중에 어찌될지 모르니 일단 먹어두자 라는 생각에 숟가락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께서는 지금 상황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우리 동네 학교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당장 밖으로 나가 집으로 돌아가기엔 위험한 상황이었기네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셨지만 우리를 많이 지지해주시고 아들처럼 느끼고 계셨다는 것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왠지 그 마음이 이 아주머니 뿐만 아니라 우리 같은 학생들을 도와주신 많은 시민들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에 들기 위해 잠자리에 누워있었지만 무엇이 날 잠에 들지 못하게 하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잠에 들고 싶은 마음에 양 한 두 마리를 세기 시작했지만 그 양들은 멀리 도망갈 뿐이었다. 정작 나에게 필요했던 수백 마리의 양 대신에 내게 온 것은 단 한가지였지만 나에겐 꽤나 진지했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눈은 뜨고 있지만 앞은 캄캄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마치 지금 이 시대 상황과 같은 꼴이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깊게 잠들었거나 깨어있지만 외면하고자 눈만 감았다면 지금 눈앞이 암흑이라는 사실을 깨우치지도 못했을 것이다는 생각에 어느 누구들과는 다르게 깨어있던 내 또래들과 시민들에게 고맙고 그저 다행이라는 마음이 컸다.
깊은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던 나에게도 수백 마리의 양들이 다시 돌아왔는지 잠에 들었다. 나와 내 친구는 아주머니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골목 밖으로 나왔다. 건물 앞 곳곳에 놓여있던 신문이 눈에 띄어 쓸어다 보았다. 언론에서도 어제 일어난 상황을 보도한 모양이다. 넓직한 종이 속에 작고 검은 글자들이 말하기를 교사들 또한 책임 추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나와 내 친구는 무사히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로부터 몇 주 뒤 찬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따뜻한 꽃내음이 메꾸기 시작한 날 우리들의 용기는 불씨가 되어 3.15마산 의거, 4.19혁명,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번지게 되어 마침내 최초의 민권 민주주의 혁명인 4월 혁명을 완수 할 수 있었다. 아마 나는 그날의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작고 연약했지만 무엇보다 빛났던 불씨가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큰 불로 와 닿긴 하였을까? 어쩌면 오늘의 우리의 눈동자에 비친 밤하늘의 암흑 속 빛나는 단 하나의 달도 그날의 우리의 앞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