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대상
다시 타오르는 불씨
대구여자고등학교 2학년 서윤정
아까부터 할아버지의 빛바랜 편지가 자꾸만 눈에 띕니다.
박수열, 우리 할아버지의 이름입니다.
흑과 백으로만 보였던 1960년 대구 중앙통. 그곳에 불씨를 놓아 붉게 불붙인 우리 할아버지, 박수열의 머리도 어느새 잿더미처럼 다시 하얗게 바래져가네요.
그날의 흥분과 아우성을 다시 상기시켜 보려는 듯 계속해서 바스락, 편지를 만지작거리시는 할아버지입니다. 궁금해진 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편지를 조용히 빼내옵니다.

친구 수열이 봐라.
니 서울서 사는 우리 사촌형 알제, 대수 형.
야당 선거 유세하는 장충단 공원에서 이승만이가 시킨 정치 깡패들이 다 때려 조졌다.
불쌍한 우리 형. 얻어맞고, 어깨 다치고, 아파하는 형 옆에서 엄마고 이모고 삼촌이고 사촌 오촌 모두모여 쌍욕을 해댔다. 그때 허겁지겁 서울 가던 기찻길에 열불나던 내 마음이 나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수열아,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이승만이라는 한 인간이 우리나라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한 인간의 문제뿐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6·25때 거창 양민학살사건에다, 친일파도 제대로 청산 못한데다, 이건 명백한 실정이다. 정당을 해체시키고,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시키고, 나는 그기 제일 충격이었다.
같은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 후보를 죽여 한국정권에서 사라지게 한 것 말이다.
우리 사회에 온갖 불법, 부패가 가득하다. 독재정권에 찌들어 삭막한 우리나라가 나는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는 이 비정상적인 사회가 나는 두렵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다.
그래서 나는 바꿔보려 한다. 우리가 살아갈 이 나라를, 우리 두 손 두 발로 한번 바꿔보자.
어른들보다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한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다.
2월 28일, 수성 천변에서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있다.
나도 사람들 다 데리고 갈라 캣는데,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대구 시내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강요하고 있다 카네.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난다. 난 그날 뛰쳐나간다. 니도 같이 나가자 수열아. 반드시 우리 학생들이여야 한다. 우리들 직접, 우리들의 목소리를, 함성을, 아니 아우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부당한 것에 지면 커서도 그런 어른이 되기 마련이다.
계속 생각하는 장면이다. 대구 시내를 우리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채우고, 선생님들도 우리와 함께 어깨동무하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 누나 형 모두 집에서 달려나와 민주화를 외친다. 우리들 모두의 눈에서는 불꽃이 이는 것이다. 우리의 불꽃은 여학생들의 치맛바람에 번져간다. 이리저리 번진 불꽃은 이젠 도무지 주체할 수 없이 커지는 것이다. 어떠냐, 생각만해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열아, 느이 반 친구들에게 많이 퍼뜨려 주라. 나는 연설문 만드는 데 동참할 예정이다.
우리 모두 손 놓고 있을 일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연루되어,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일구어야 한다. 다치고, 아픈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모든 불합리를 바로잡아야 한다.
2월 28일, 수성천변이다. 꼭 기억해라.

-민식-


할아버지의 편지를 다 읽은 나는 왜인지 몸은 서늘하지만 가슴은 뜨거워집니다. 어딘가에서부터 아주 오래된 물레를 타고 엉키고 엉킨 응어리 같은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옵니다.
내 이 떨림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2월 달의 늦은 눈 때문일까요, 편지지의 바랜 빛 때문일까요.
아아, 드디어 알겠습니다.
편지를 들고 있는 내 손 뒤로 언뜻 보이는, 할아버지의 잿가루 같은 회백색 머리칼 때문입니다. 그 잿가루 속,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불씨가 보입니다.
작지만 딴딴하고 뜨겁게 빛나는 작은 불씨가 보입니다.
학생 민식이의 편지 쓰던 앳된 손 지나, 사촌형 용호 다리 열바늘이나 꿰맨 상처를 지나. 여학생들의 치맛바람을 지나, 어머니 아버지 태극기 지나. 학생 박수열의 마음까지 번져온 작은 불씨가 보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혹은 가슴에서 아른거립니다.
이 불씨는 무엇입니까.
이 불씨는 불의에 분노한 학생들의, 모두의 마음입니다.
이 불씨는 자유를 위한 우리 모두의 열망입니다.
이 불씨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슬프나 힘찬 몸부림입니다.
이 불씨는 앞으로의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신호탄이기도 합니다.
이 불씨는, 민주주의 그 자체입니다.
작은 불씨가 나에게도 번져온 것일까요, 내 얼굴 위인가 가슴 언저리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흐릅니다. 나는 뭔가 깨달은 듯 작은 불씨를 받아 품습니다.
나는 이 불씨를 내 가슴 깊은 곳으로 끌어 옵니다.
나는 그제야 깊게 알았습니다.
학생 박수열의 불씨를 비로소 이어받은 나는, 바람이 우리를 찢고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언제든 어깨동무하고 광장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