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2·28, 그 정신의 계승
대구공업고등학교 2학년 이지훈
2월 28일 일요일 낮 12시 55분 수많은 학생들이 보는 와중 그들을 내려 보던 두 학생이 격앙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낭독했다. 원래 웃음기가 가득할 학생 때일 텐데 지금 두 학생들의 얼굴엔 사뭇 진지함이 가득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두 학생의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그것을 잠잠히 듣고 있던 다른 학생들은 흥분이 고조되어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학생들은 학교를 뛰쳐나오고 시내를 행진하였다. 시내를 걸으면 걸을수록 다른 학생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 수를 보니 1000명이 넘었다.
처음 경북고에서 시작해 대구고, 경북대 사대부고, 대구공고 등 총 8개 고교의 학생들이 대구 시내를 행진하며 이승만 정권의 부패를 외쳤다.
시위가 계속되자 결국 경찰들이 투입되어 무고한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였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시민들은 연행하려는 경찰을 말리고 경찰에게 쫓기는 학생을 몰래 숨겨주기도 했다.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체포한 학생들을 대부분 풀어주었다.
이후 2·28 학생민주운동을 도화선으로 3·15 마산의거, 4·19 혁명 등 여러 민주운동으로 퍼져나가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하게 됨으로써 독재정권은 무너지게 된다.
그런데 그 시대, 이승만 정권이 집권하던 당시 분위기는 상당히 공포스러웠다고 한다. 연이은 부정선거에도 어른들은 입을 꾹 닫고 가만있었고, 언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이곳 대구에서, 그것도 학생들이 처음으로 나섰다는 것에 대해서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인 학생 반정부 시위였다. 2·28을 기점으로 다른 여러 시위가 일어났고 최종적으로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 때의 학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나갔을까, 당시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고 돌아올 후폭풍을 뻔히 알 텐데. 하지만 1000명이 넘는 대구학생들은 시내로 나가 부당함을 외쳤다. 학생들은 독재, 부패와 부정들에 항거하는 민주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린 그날의 민주정신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대로여선 안 된다.
이전의 여러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들도 겪었지 않은가 전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그것을 끌어내릴 수 있도록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깨어난 시민들의 민주정신이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돌려도 권력이 있는 자들의 부패 행각이 벌어진다. 우린 민주정신을 더 키워야한다. 완전히 부패가 사라질 때까지. 하지만 그러기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우리 세대에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때의 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날의 우리들을 있게 만든 2월 28일의 영웅들,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단결과 땀과 희생을 배경으로 한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상이다.”
- 베레버드